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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Mar 14. 2020

여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영화 <조커, JOKER> 후기 (2019)

여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사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막 해고를 당한 아서 플렉이 피에로 분장을 한 채 지하철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한 후, 자신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느끼고 일상에서 소피와 데이트도 하고 코미디언으로 클럽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잘 살기를 바랐다. 분명히 잘못되었고 이미 원죄가 들어와 버린 듯한 새 출발이었지만, 아벨을 죽이고 도망친 카인을 신이 지켜주었듯이, 그래도 ‘Put on a happy face’ 하면서 잘 살기를 바랐다. 혹시 그랬더라면 아서는 머레이쇼에 출연하면서 세상이 수용하는, 성공한 평범한 코미디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곳은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1980년대의 고담市이다. 상류층 사람들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깔깔거리며 찰리 채플린 쇼를 관람했고, 아서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처럼 자주 권총 격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rt)라고 이미 말했고, 조커로 변해 가는 아서는 “내 인생은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I used to think my life was a tragedy, but now I realize, it’s all just a fucking comedy)라고 내뱉었다.


그런데 아서는 왜 피에로 분장을 한 조커가 되었을까? 이 영화가 배트맨의 프리퀄이라서? 그런 것 같지 않다. 이 영화는 단 한순간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을 허용하지 않는 매우 강한 오리지널러티를 보유하고 있다.


피에로는 본래 ‘미친 바보’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미친 바보들은 중세까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가 끝나면서 그들은 추방되었고 근대 합리주의는 그들을 정신병동에 감금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그들을 대상으로 임상을 하였다. 아서가 ‘Don’t forget to smile!’에서 가운데 두 단어를 지우고 ‘Don’t smile!’로 고쳐 쓴 것처럼, 피에로는 웃지 말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 피에로가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삶을 살며 단 1분도 행복한 적이 없었으며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무례하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느냐’는 식의 질문만 반복해서 매주 그에게 던졌다. 그는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왔는데 (지하철 살인사건이 보도되자)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사실 피에로는 아를르캥과 함께 이탈리아 희극 예술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전통적인 복장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 코미디극의 배역이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셀 투르니에가 말하길, 얼굴에 밀가루칠을 하고 있는 피에로는 여유 있고 헐렁헐렁한 검은색과 흰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본래 천진난만하고 소심하며 낮보다는 밤을 좋아하고 달과 친한 ‘정착자’이다. 피에로와는 달리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아를르캥은, 흰색과 검은색을 제외한 여러 가지 색의 마름모꼴 무늬가 있는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있으며 날렵하고 대담하고 건방지며 태양과 친숙하다. 아를르캥은 ‘유랑자이며 바람둥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두 유형 중 하나이다. 소심하고 말이 없는 피에로 혹은 화려하고 재미있는 아를르캥이다.

 

혹시 피에로였던 아서는 세상이 자신을 수용하지 않자 아를르캥의 속성을 더하면서 조커가 된 것은 아닐까? 우발적인 살인을 통해 소심한 그가 ‘선을 넘어’ 화려한 아를르캥의 가면을 쓰고 변형되어 나타난 것은 아닐까? 자신을 ‘조커’라고 소개해달라고 요청하고, 지워진 얼굴 화장을 자신이 흘린 피로 고친 후 성난 대중을 향해 돌아서면서, 그는 피에로도 아를르캥도 아닌, 파괴의 광기와 분노의 슬픔을 지닌 괴물 조커로 변화한 것이리라.


그 원인과 귀책을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커는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미친 건가요, 아니면 세상이 더 미쳐가는 건가요?” (Is it just me, or is it getting crazier out there?)


미셀 투르니에가 다시 말하길, 사실 아를르캥을 유혹하는 화려한 색채들은 언제나 피에로에 의해 화학적이고 독성이 있으며 피상적인 것으로 폭로된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일시적으로 가지게 되는 속성 즉 우유성을 아를르캥이 상징한다면 피에로는 본질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그 둘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그 속성만을 기준으로 각자 독립적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몇 가지만 더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아서 플렉 역할의 왁킨 피닉스의 메소드 연기는 가히 압권이었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왁킨 피닉스에 의한 영화였다. 그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보여 주었던 코모두스 황제의 모습, 즉 열등감으로 왜곡되고 비열하고 사악하며 경박하지만 로마 황제의 신분에서 우러나오는 고귀함이 섞여 있는 모습이, 영화 <조커>를 보는 동안 묘하게 교차되면서 아서 플렉의 캐릭터가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조커의 춤! 한국에서도 개봉 후 각종 패러디를 낳은 조커의 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서는 처음 지하철 살인 후 도망쳐 어느 화장실에 숨어 심취한 듯 춤을 춘다. 그 후 아서는 살인을 하기 전에 반드시 춤을 춘다. 그가 춤을 추면 불안해진다. 그런데 그 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냥 좋아서 춤을 추었을까?


대형동물이 그려져 있는 석기시대 동굴벽화를 자세히 보면 흥미롭게도 1센티미터 굵기의 할퀴고 긁힌 듯한 상처가 수없이 나있다고 한다. 벽화가 어두운 동굴 속에 있다는 점과 그 상처들은, 석기시대 동굴벽화가 예술적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석기시대 사람들은 왜 동굴벽화를 그렸을까? 인류학자들이 남태평양 원시부족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창으로 벽화 속의 대형동물을 찌르며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사냥할 동물을 반드시 잡게 해 달라는 주술이며 그것은 약자인 인간이 강한 존재였던 동물을 사살하기 위한 긴장감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석기시대 사람들에게 ‘회화는 무기’ 였던 것이다.


조커에게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심한 피에로가 화려한 아를르캥의 속성을 빌어 폭발하는 광기와 고결한 슬픔의 조커가 되기 위해, 주술 도구와도 같은 퍼포먼스가 필요했고 그것이 ‘조커의 춤’이었을 것이다. 아서에게 ‘춤은 무기’였던 것이다. 참고로 아서의 첫 번째 춤 장면은 각본에는 없는 즉흥연기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려고 한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나는 영화 상영 내내 계속해서 고담市의 뉴스와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서가 피에로 분장을 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이상하다.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서가 피에로 분장을 하고 있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관객들은 그 뉴스를 통해 미화원 파업 소식을 듣게 되고 영화를 보는 동안 토마스 웨인의 시장 출마 기자회견, 아서의 지하철 살인사건 이후 反부유층 집회와 폭동 등 고담市 관련 각종 언론보도를 아서와 같이 계속 보고 듣게 된다.

 

머레이 프랭클린의 머레이쇼 생방송에 출연한 아서가 머레이를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라이브로 송출되고 그 사건을 일제히 보도하는 다수의 방송채널들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등, 영화 속의 방송미디어는 단순한 소품 혹은 배경이 아니고 가상의 도시 고담市에 대한 영화적 현실감을 높이면서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중요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조커에 깊이 몰입하고 공감했던 요인이 혹시 내가 아서와 동일한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 즉 미디어 조작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런저런 분석은 이쯤에서 끝내고 “상상 그 이상의 전율”이라는 영화 <조커>에 대한 한 줄 평을 한다면…. “아름답고 잔인하고 감각적인 화면과 스토리, 하지만 회피하고 싶은 메시지, That’s life!” 그런데 이 영화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아서의 망상일까?


잠깐! '나는 서류 작업만 할 뿐이다.'(I’m just doing paper work.) 영화에서 들은 대사인데...누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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