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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택할 수 있다

중독자 가족이 회복에 이르는 길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중독자를 대하는 내 방식이 자동적 반응이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술을 마실 핑계가 필요한 중독자의 도발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서 감정이 폭발해 결국 중독자의 의도대로 되는 빌미를 제공하곤 했다. 중독자와 함께 얽혀서 뒷바라지를 하고 헌신을 했다가 화를 내고 결국 지치는 악순환을 하기도 한다. 의심의 빌미를 제공하는 중독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다 더 큰 반항을 불러오기도 한다. 중독자를 미워하고 냉담하게 대하면 중독자는 소외되었다고 느끼며 더욱 중독으로 달려간다. 결국 모두 중독을 더욱 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분노, 의심, 좌절, 우울, 무기력, 망상, 고통이 거의 자동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믿기 어렵지만 주변사람들의 이런 자동적 반응은 중독의 불꽃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던 것이다. 미쳐 날뛰는 중독자 옆에서 나도 같이 재료를 제공하며 풍선인형처럼 펄럭이고 있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흔히 중독자는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있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술을 마시고 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핑계를 낚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독자는 곳곳에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걸려라, 걸려라’하고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중독자 가족이 덥석 낚싯바늘을 물게 되면 중독자는 ‘옳다구나!’하고 물고기를 낚아챈다. 중독자의 가족이 중독자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중독자가 원하는 대로 싸우고 다투고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을 핑계로 중독자는 더 고립되고 자신의 중독을 더 심하게 만든다. 중독자 주변에 가까이 있는 중독자 가족이 제일 먹잇감이 되기가 쉽다. 따라서 중독자 가족은 이런 기제를 미리 알고 절대 중독자가 드리우는 낚싯바늘을 물지 않아야 한다. 내가 바늘을 물고 낚여 올라갈지 바늘을 물지 않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중독자가 낚싯바늘을 드리워도 주변사람이 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주변사람의 선택과 반응에 따라 중독자는 핑곗거리를 얻을 수도 있고 못 얻을 수도 있다. 가족이 현명한 선택을 함으로써 더 이상 중독자에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다.


그동안의 나의 반응이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음을 안다면 나는 이제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반응 또한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선택을 바꾼다면 나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중독자가 외박을 하겠다고 할 때 반드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동적으로 화가 뻗친다. 감정이 먼저 치고 나오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덮어놓고 화를 내었다. 그러면 중독자는 당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고 자신을 믿지 못한다며 오히려 더 화를 내고 결국 다툼을 하고 서로 냉담해지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싸움은 필연적으로 더 술을 불러왔다.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멈추고 생각을 해 본다. 화를 내는 것이 좋을지 무시하는 것이 좋을지 허용하는 것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상대방으로 인한 이 상황의 잘잘못은 신께 맡기고 내가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나는 중독자와 함께 따라갈 수도 있고 쿨하게 알겠다고 하고 나의 밤을 보낼 수도 있다. 혹은 무시할 수도 있다. 때로는 서운하고 걱정된다고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화를 내고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중독자와 다툼과 언쟁을 벌일 수도 있다. 예전과 같은 반응을 보일지 새로운 반응을 할지, 어떤 행동과 반응을 보일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중독자가 아이의 축구시합에 오겠다는 약속을 어길 때 혹은 저녁 데이트 약속을 갑자기 펑크낼 때 예전 같으면 실의에 빠져 속상해하고 나의 감정과 하루는 온통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비참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중독자를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복의 원리를 안다면 이 순간 자동적 반응을 멈추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순간에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오지 않는 중독자를 욕하는데 나의 감정을 쓰지 말고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중독자 없이도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예정된 스케줄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영화 관람을 함께 하기로 한 중독자가 오지 못하면 나는 혼자서 그 영화를 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혹은 영화관람을 취소하고 쇼핑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대안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으니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해 보자고 마음먹으면 문제는 훨씬 간단해진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구를 필요가 없다. 짜증을 낸다고 오지 못한 중독자가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갈등만 깊어질 뿐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나에게 도움이 될지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상대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진리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행동은 내가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영역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다. 내 감정, 내 사고, 내 행동은 내가 결정하고 바꿀 수 있다. 이것은 내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내 삶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멸망으로 향하는 파멸의 길을 갈 수도 있고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인 것이다. 이것은 중독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장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예기치 않는 불행이나 사고가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비행기에 실은 짐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틀어진 계획에 마음이 상하고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분노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필요한 물건을 구해본다거나 일정을 늦춘다거나 혹은 보상을 요구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뜻밖에 더 멋진 물건을 갖게 될지, 예상치 못한 시간과 경험을 보낼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원망하는 선택을 할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지 그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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