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훔쳐가는 행복도둑을 잡아라
올해도 벚꽃이 피었다. 온 세상이 몽글몽글한 분홍으로 화려한 옷을 입는다. 딱히 유명한 명소를 찾아가지 않고 집 앞을 나서기만 해도 마주치는 이 화사함이란! 어김없이 봄꽃을 볼 수 있다니 참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내가 수고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계절은 바뀌고 날은 따스해지고 낮은 길어지고 꽃망울은 피어난다. 그리고 여린 속살처럼 보드라움과 눈부신 화사함과 그 어떤 부자도 입어 보지 못했을 완벽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나에게는 화사하게 핀 벚꽃을 보러 가는 것이 하나의 의미가 있다. 10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나는 유치원생 아이 둘을 둔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동안은 일하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긴 해도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과 안정감이 내 삶을 지탱했다. 이제 조직도, 명함도, 월급도 없어진 그 해 봄 나는 참 두렵고 막막했던 거 같다. 그 해 나는 벚꽃을 보러 갔다. 아이들 손을 잡고.
우리 집 근처에서 조금만 걸으면 하천 옆을 따라 벚꽃길이 늘어진 벚꽃 명소가 있다. 봄꽃을 보려고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 나도 아이들 손을 잡고 걸었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꽤 고급스러운 돈가스집에 가서 어린이세트를 시켜주었다.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그 후로 매년 봄이 되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벚꽃을 보고 돈가스를 먹었다. 돈가스집은 2층 계단을 올라가면 있었는데 오래된 나무를 사용해서 일본식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고 칸막이가 있는 개별좌석에 앉으면 맛있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겼다. 좌석에는 깨를 갈 수 있는 절구가 있었고 바삭한 정통돈가스부터 김치치즈나베 등 여러 메뉴가 있었다. 막내아이는 어린이 세트를 좋아했다. 비행기 모양의 접시에 돈가스와 밥, 샐러드가 담아져 나왔고 한 칸에는 후르츠칵테일도 담겨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컵에는 오렌지 주스가 담겨 나왔다. 벚꽃을 구경하고 돈가스까지 먹으면 그 주말은 참으로 행복한 한 주였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봄이 되어 벚꽃 구경을 올 수 있으면, 아이들과 돈가스를 먹을 수 있으면 나는 행복한 거야. 꽃구경을 올 마음의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거고 살짝 비싼 듯한 외식도 한 번쯤 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거라고. 이 정도면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여겼다. 꽃이 얼마나 금방 지는지. 미루면 결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딱 그 주에 보러 가지 않으면 금세 후드득 지고 만다. 다음 주에 가야지 했다가는 야속하게 비가 내리고 마는 것이 벚꽃이다. 그래서 만개했을 때, 딱 그때 보러 가야 한다. 모든 일을 떨치고 벚꽃을 보러 갈 수 있다는 건 내 삶이 그만큼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거니. 벚꽃을 보러 올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꽃구경을 가겠다는 마음의 여유, 아이들과 외식 한번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삶이라면 괜찮지 않나. 나는 매년 벚꽃을 보고 돈가스를 먹는 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기로 했다.
이제 아이들은 자라서 아이들은 각자의 친구들과 꽃구경을 갔고 우리 부부만 둘이 산책을 하게 되었다. 돈가스집은 없어지고 남편과는 국밥을 먹었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지만, 올해도 나는 벚꽃구경을 간 것이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올해도 삶이 피었다 지며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