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의 책장

by 간질간질

돌멩이와의 무의미한 카톡을 끝냈다. 수제비는 원고를 마감해서 보내 놓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아주 옛날 수제비가 제일 먼저 만들었던 이메일은 hanmail이었다. 인터넷이란 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 다음이란 촌스러운 회사에서는 이메일을 공짜로 준다고 했다. 모두가 가입했다. 이메일이란 개념을 처음 심어 준 것이 다음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hotmail이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메일 주소를 불러줄 때 '핫'이 아니라 '한'메일 쩜 넷이라고 첫자에 강세를 둬야 했다. 공짜로 물건을 나눠주는 이상한 회사가 생겼으니 그 회사는 곧 망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 댔다. 회사가 성장할 때도 위태위태하다고 했다. 잘 나가던 한메일에 '우표'라는 이상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갔고 또 망한다고 얘기했다. 경쟁업체였던 네이버가 쑥쑥 크고 네이트가 나타났을 때도 다음은 곧 망한다고 했다. 그 망하다던 회사는 여태까지 살아남이 있다. 비록 주인은 바뀌어서 카카오가 가진 '다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누가 가장 강한 자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다음은 보여주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처럼 다음은 살아남은 강자다.


지금 수제비가 보낸 메일함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음의 '한'메일이 아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갈아탔듯 gmail이다. 다음이 PC 시대의 강자였다면, 스마트폰 시대의 강자는 구글이다. 구글의 검색은 철벽과 같던 네이버의 검색을 이기진 못했으나 스멀스멀 올라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구글의 검색은 아직 1등이 아니지만 동영상분야에서 구글의 유튜브는 이미 네이버를 제친 후에 멀리 따돌려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다. 아이폰을 고집하지 않는 수제비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안드로이드폰 그중에서도 갤럭시폰을 쓴다. 나이도 먹지 않은 사람이 왜 아이폰을 쓰지 않냐고 물을 때 수제비는 누를 수 있는 버튼이 하나밖에 없어서요라고 대답한다. 수제비는 여전히 뒤로 가기 버튼이 없는 아이폰은 불편하다. 수제비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히는 것에 별 취미가 없다. 그런 수제비마저 이제 gmail을 쓴다. 그만큼 스마트폰은 모든 사람을 바꾸어 놓았다.


cd 플레이어 대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장 보러 가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하고, 전화 대신 스마트폰으로 잡담을 하고, 신문 대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고, 디카 대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신용카드 대신 스마트 폰으로 결제를 하는 수제비지만 책 대신 스마트폰을 쓰지는 않는다. 밀리의 서재라는 무제한 책 읽기 서비스에 혹해 이용을 했지만 한 두 번 써보곤 이내 app을 지웠다.


수제비 방의 주인은 책이다. 수제비는 책방에 빌붙어 사는 동물처럼 보인다. 가로 세 칸 세로 다섯 칸짜리 커다란 책장이 4개, 3칸짜리 자투리 책장이 2개. 모든 책장과 주변엔 책이 두서없이 꽂혀있다. 수제비의 아비가 방문한 날이면 이상하게 방이 깨끗하게 보인다. 달라진 것은 아비가 정성스럽게 정돈한 키맞춤 방식의 책꽂이때문이다. 깔끔함에 놀라지만 어딘가 낯설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면 어수선하고 뒤죽박죽 책장으로 바뀐다. 아직도 키가 맞춰져 있는 책장의 칸은 수제비가 손을 대지 않은 영역이다.


수제비의 책장에는 소설책보다 잡스러운 취향의 책들이 더 많이 들어 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인구가 모여 사는 LA를 옮겨 놓은 것 같다. 중국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지만 중국식 책장은 99%의 소설책과 샘플같이 한 종류의 책이 꽂힌 것과 비슷하다. 수제비의 책장은 미국식이다. 소설책. 역사책, 종교, 문화, 과학, 경제, 재테크, 철학, 미술, 고전, 그림, 사전류, 여행, 전공서적까지 모든 책이 뒤섞여 있다. 수제비의 머릿속처럼 수제비의 인생처럼 뚜렷한 전문성이 없지만 뭐든 아는 체 할 만한 내용들이다.


수제비는 책장을 훑어봤다. 점점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는다. 외고일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챙겨주는 증정도서들도 늘어난다. 돈 주고 산 책은 중고로 팔기라도 하지 증정 도서들은 '증정'이라는 낙인(?)을 찍어 팔 수도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 좋은 마음에 전해준 책을 읽지도 않고 버리기도 못해 끌어안고 있다. 옛날에 사놓은 책은 누렇게 종이가 바래고 일어나 인쇄된 글자가 풀럭 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버리지 못하고 끼고 있다. 할머니들이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궁상맞게 움켜쥐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끔씩 옛날 책을 꺼내서 읽다 보면 내용의 새로움에 놀라고, 읽었었던 사실에 놀란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나이 들어 쇠퇴한 뇌의 현실이다. 수제비는 한 때 온라인 서점의 북리뷰를 하며 살 수 없을까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Yes24 도서 본부장에게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해봤지만, 북 리뷰를 하려면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을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보도자료를 베끼지 않는 수준의 글을 내놓아야 한다며 만류했다. 노안과 쑤시는 허리를 가진 중년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수제비는 책을 꺼내서 누구에게 줄까 생각도 했지만 남에게 주기엔 지나치게 재미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반인들에겐 재미없고, 전문가들에겐 입문서 수준의 책들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책들이다. 수제비의 능력이 꼭 그렇다. 일반 업무에는 흥미가 없고 전문가들에겐 우스워 보이는 수준. 그래서 어디에 끼어들기 어렵다. 글 쓰는 메이저 언론사들의 기자야 브랜드빨이라도 업고 잰 체 할 수 있지만 퇴직한 기자들은 일반인들과 경쟁하기엔 너무 점잖다. 아니면 양아치다. 수제비는 양아치가 아니니 점잖게 뒷짐 지며 손해를 보는 측에 속한다. 그래서 책을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새로운 내용이 업데이트되지도 않고 무겁고 낡았지만 책이 주는 존재감. 그 존재감 때문에 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수제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존재감이다. 세상 한구석에 존재하는 사람의 존재감.


수제비의 책장엔 수제비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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