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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Sep 10. 2021

옻칠 작가 허명욱 작업실

 바르고 마르고 바르고 마르니 억 겁의 세월

푸른 하늘 저 멀리 라라라~힘차게 날으는

우주 소년 아~톰 용감히 싸워라.

언제나 즐거웁게 라라라~힘차게 날으는

우주 소년 아~톰, 우주 소년 아톰!


맨 위 오빠는 67년생, 막내인 나는 71년생이다. 중간 언니가 있지만, 언니는 얌전한 인형놀이를 하는 여자아이였다. 선머슴같이 나는 오빠와 항상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전거 타기, 짬뽕 등을 하고 왕십리 시장 바닥을 휩쓸고 다녔었다. 오빠와 나는 취향이 같았다. 언니는 ‘들장미 소녀 캔디’를 볼 때, 우리는 ‘날아라 번개호’, ‘우주 소년 아톰’을 보며 안방 장롱에서 꺼내 든 분홍색 보자기를 목에 걸고 소파에서 뛰어내리며 아톰 놀이를 했었다. 그리곤 커가면서 한 번도 아톰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시작은 매우 심플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는 것이 자산이 되니까. 원 오디너리 맨션을 방문했던 몇 달 전, 알고 있던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의 가구보다는 내 눈에는 아톰이 들어왔다. 아톰 작업을 하는 작가님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톰 실물을 직접 본 것은 오디너리 맨션에서 처음이었으니까.

 

매니저에게 물었다. ‘작가분이 일본 분이냐?’ ‘이 작가분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그녀는 ‘한남 작업실’을 가보라고 알려주었고, 한남 작업실, 프린트 베이커리, 허명욱 쇼룸, 인스타그램 등을 걸쳐서, 그리고 오늘 작가님을 뵈었다.

 

그의 손을 보았다. 살들은 온통 갈라져 있었고, 손톱 사이사이 새까만 옻칠들이 자리 잡은 지 오랜 시간이 걸린듯한 손이었다. 작가의 손이라는 지식 없는 상태로 손만을 대했을 때는 여느 막노동꾼의 손이라는 생각으로 감히 눈여겨보지도 못했을 손이다. ‘내 이리도 선입견적인 인간이었던가!’ 창피할 틈도 없이 그의 손으로 내린 커피 맛은 향긋하다 못해 코끝으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어린 시절, 동네 말썽쟁이가 위로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였던 아톰


고작 17세 나이에 나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었던 문진으로 눌러 놓았던 자퇴서


스스로 부르주아를 포기하고 홀로서기를 했던 힘든 시절


잘 나가던 사진작가로서 ‘내 작업이 하고 싶다’라는 목마름으로 작업 전향을 했던 용기


택시 안에서 아버지가 잡았던 따뜻한 손과 말 한마디


큰 형의 부재와 작은 형의 아픔


1년에 3번 이상 이사를 가야 했던 이야기와 벽지를 뜯은 기억에 대한 작업


‘오늘의 색’의 개념


결국은 잔인한 검정


회화가 아닌 생활용품을 왜 하냐는 관장님들 vs. 왜 이런 작업들이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타당성


‘이건 얼마짜리 그림’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작품


포항 댁의 간장 종지부터 시작한 지독한 팬심이 결국은 미술 애호가로 만들어진 스토리


이성란 소장님과의 우연인 듯 필연의 사연들(사실 나는 이태원 Be my guest 건축부터 이 소장님 작업을 좋아했었다.)


결국 10년 이상 선생님 곁에 남아있는 스텝들


찾다 찾다 찾아낸 RPM coffee factory


얼반 자카파의 잘은 모르겠지만 박용인 씨의 사연,  그리고 ‘널 사랑하지 않아’ 곡과 함께 했던 가을날 같았던 바람


작업실을 지키고 있던 손바닥만 한 두꺼비


정성스럽게 내리던 선생님의 새까만 손톱의 커피 한 잔


아톰 헬멧을 쓰고 있던 소년의 눈웃음


내가 좋아하는 이끼를 키우시던 테이블


잘 정돈된 도구들


시간의 축적


건축 공간뿐만이 아닌 장작 셸터까지의 박고 지붕


벽에 걸려있던 드로잉


스위치 이야기


색의 기록들


직접 사인해 주신 도록


3 작업실 지하에 있던 나무와 스프링클러의 쉭쉭 대는 소리


가을바람과 옻의 냄새들


‘옻’이란 무릇 바르고 마르고 바르고 마르길
억 겁의 세월을 잊을 만큼 해야
비로소 세월의 두께만큼 입혀지는
‘칠’ 일 것이다.



#옷칠#허명욱#칠하다#overlaying#세월을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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