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핫컨텐츠 카피라이터 설희재
김원세: 희재 님 안녕하세요. 광고 배우는 대학생 김원세입니다. 현재 레드핫컨텐츠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계시는데, 어떤 회사인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설희재: 레드핫컨텐츠. 회사 이름이 생소하죠? 이름이 독특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회사예요. 레드핫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순간 알겠더라고요. 빨갛고 뜨거운 콘텐츠. 예를 들면, 모두가 멋있게 앞으로 걷는 모습을 고민할 때 레드핫은 나 홀로 춤을 추며 뒤로 걸어가는 크리에이티브를 내요. 넘쳐나는 콘텐츠의 시대에서 멈춰 서게 만들더라고요. ‘어쩌면 콘텐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회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원세: 희재 님께 여쭙고 싶어요. 카피를 쓰고, 크리에이티브를 고안해내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희재 님은 왜 카피라이터인가요?
설희재: 광고홍보학을 전공해서 기획 관련 공부를 했고, AE로 일도 했어요. 광고 기획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에요. 시장과 사람을 분석하고,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세워 실행하며, 광고주와 소통하는 일. 다채롭죠. 그런데도 카피라이터로 전향한 이유는 제가 카피 쓰는 일을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저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성장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첫 번째,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두 번째, 보완해야 합니다. 카피를 쓰는 일은 시대와 나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해요. 물음을 멈추는 순간 카피가 아닌, 공감받지 못하는 문자에 불과하죠.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일이 아닌, 오늘은 잘했어도 내일은 불안할 수 있는, 그래서 끊임없이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김원세: 그러니까 성장의 욕구가 희재 님을 카피라이터로 이끈 셈이네요.
설희재: 네.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하는 성장환경을 임의로 만드는 거죠.
김원세: 자기 기준을 지키는 희재 님만의 방식이네요.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려는 모습이 멋집니다. 그럼 넘어가서, 카피라이터로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도 궁금해요.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오늘 일과를 예시로 말씀해주세요.
설희재: (재밌는 게 생각난 듯 웃으며) 우선 출근하면 뉴스와 유튜브를 봅니다. 제가 볼 때 제작팀의 최고의 장점은 업무 시간에 어떤 영화를 봐도, 또 어떤 책을 읽어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영감을 얻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축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어? 왜 일 안 하고 농땡이 피우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출근하면 제 주식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고, 유튜브를 봅니다.
김원세: (덩달아 웃으며) 저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오늘부터 헛된 꿈을 꿀 수도 있겠네요.
설희재: “뭐? 걔들이 하는 게 유튜브 보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아침을 환기하는 셈이죠. 그리고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한 아이디어의 피드백이 와서 디벨롭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원세: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설희재: 광고주 쪽에서, 보다 부각 됐으면 하는 포인트를 토대로 피드백을 주면 저희는 내부 회의에서 어떻게 하면 이 피드백을 우리 색깔에 맞게 적용하여 아이디어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하는 거죠. 내일모레쯤 다시 제안해야 하니까 그전까지는 계속 아이디어 보완 작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는 제작팀이 출근하면 각자가 들고 온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회의를 할 것 같아요.
김원세: 대학생의 입장에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는데요. 희재 님도 대학생 시절 광고 공모전을 나가거나, 조별 과제를 하거나, 팀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광고 배우는 대학생에게서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이디어 회의인 것 같아요. 저 역시 학교에 다니면서 수많은 회의를 경험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희재 님께서 생각하시는 대학생 시절의 아이데이션과 실무에서의 아이데이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설희재: 프로세스 자체는 비슷해요. 기획 흐름을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준비해오고요. 그런 다음에는 업계 은어로 안을 깐다고 하죠. 서로의 안을 까서 괜찮은 아이디어로 결정을 하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그 자리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어 디벨롭하는 일련의 프로세스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학생 때의 아이디어들은 입체적이지 못하죠. 막연히 내가 쓰고 싶은 이미지와 카피를 씁니다. 고려할 것이 크게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스킨 광고를 만드는데 ‘피부를 촉촉하게’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대학생 때는 ‘촉촉함’을 일차원적으로 변형하여 표현하는 데서 그치죠. 하지만 실무에서는 브랜드 인지도를 남기는 데 있어서, 보는 이들이 예상이 가면 크게 와닿는 광고가 될 수 없겠죠? 짧은 시간 안에 임팩트 있게 전달 가능한 은유, 비유 등의 색다른 표현이라든지, 배경 음악이라든지 촉촉함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고민해야 하는 거죠.
그러고 난 다음 과정에서 실무자와 대학생의 차이가 확연히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실무에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기획 방향이 공유되어야 해요. 한 명이라도 방향성에 어긋나는 아이디어를 계속 들고 오면 서로의 업무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팀장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누군가 아이디어를 들고 왔을 때, ‘이것이 우리의 핵심 메시지와 방향을 잘 포함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해요. 그러한 기준이 있어야 방향이 어긋나는 아이디어에 “우리가 담고 싶은 메시지와 표현해야 하는 방향은 이쪽인데, 너의 아이디어는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핵심 메시지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라고 정확한 디렉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아이디어 이슈는 서로의 취향이 많이 들어가요. 그러다 보면 서로의 아이디어에 피드백을 줄 때 기분이 상할 수가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광고하는 사람으로서, 목표를 취할 수 없는 개개인의 취향은 버릴 줄 아는 자세가 있어요. 그러니까 실무에서의 아이데이션은 “이 취향은 별로야.”, “이건 느낌이 좀 별론데?”가 아니라, “이 아이디어는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우리의 방향은 직관적인 표현으로 어텐션을 유도해야 하니 두 번째 옵션으로 왼쪽 주머니 속에 넣어두자.”와 같이 팀장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회의가 진행되는 거죠.
학교 다닐 때는 서로가 아이디어를 내는 기준이나 방향이 뚜렷하지 못하니까 회의가 길어지기도 하고, 산으로 가곤 하죠. ‘이 아이디어는 별론데.’라고 속으로 생각해도 명확한 피드백을 해주지 못한 채 회의가 진행되는 것 같아요.
김원세: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비교네요. 저 역시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장 혹은 팀장을 하게 되는 경험이 잦은데, 팀을 이끄는 위치에서 ‘내가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럼 희재 님의 회사에서는 레드핫컨텐츠 대표님께서 팀장의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설희재: 네, 맞아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대표님이죠. 제 아이디어를 10개 들고 가서 10개가 까여도 기분이 나쁘지 않죠. 오히려 ‘아, 내가 이 방향을 놓쳤구나.’ 하게 돼요.
김원세: 그만큼 팀장의 역할이 중요하네요.
설희재: 그래서 팀장은 캠페인의 중심을 잘 잡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만약 기준이 흔들리는 사람이 팀장을 맡으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죠. 그래서 저희 회사가 정말 좋은 게, 아이디어 회의가 1시간을 넘어가 본 적이 없어요. 회의가 길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기준이 없으면 ‘이게 맞나?’ 갸우뚱하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죠. 그런데 1시간 안에 회의가 끝난다는 건 그 이후에 각자가 더 보완해서 가져올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자리로 되돌아가서, 내 아이디어가 어떤 점이 부족한지 명확하게 알았으니 그 빈틈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거죠.
김원세: 팀장의 명확한 기준에서 발현되는 정확한 디렉팅은 회의 시간을 절약하고,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의를 거친 후에는 나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고, 팀이 도달해야 할 아이디어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네요. 리더의 역할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설희재: 그래서 저는 저희 CD님이 그렇게 디렉팅하실 때마다 감탄스러워요. 제가 아이디어 회의 중에 ‘저 아이디어로 가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저걸 어떻게 피드백할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CD님은 이미 당사자가 기분 나쁘지 않게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게끔 설명해주세요.
김원세: 희재 님이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이질감을 느끼는 동안 팀장님께서는 바로 논리적으로 표현하시는 거군요.
설희재: 네네, 그렇죠. 똑같이 생각해도 그렇게 표현을 못 하죠.
김원세: 제가 아는 희재 님도 디렉팅을 정확하게 해주시는 편이라, 긴 시간이 흘러 CD의 자리에서 발현될 희재 님의 리더십이 기대가 되네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설희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져요.
설희재: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성장을 지향해요. 그런 이유로 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넘어왔고요. 그렇게 계속 광고회사에 다니다 보면, 내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직접 회사를 차릴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저희 대표님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팀장이란 위치는 단순히 연차가 쌓여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기준과 방향이 있어야 아이디어가 가진 탁월함이나 부족함을 파악해 팀원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런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문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만약 팀장의 위치에서 아이디어를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각이 정리되어야 하고, 핵심을 이해하고 있어야 할까? 카피는 논리적이어야 하고, 이미지는 감각적으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체계가 잡히면 참 좋겠다. 그래서 광고를 시작했다면 CD까지는 도전해보는 게 맞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원세: 그러시군요. 그럼 다시 돌아와서 대학생과 실무자에 대한 비교를 계속해서 해보겠습니다. 희재 님도 일하시면서 대학생 시절보다 시야가 넓어지셨을 것 같은데, 대학생 설희재와 카피라이터 설희재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요? 어떻게 보면 대학생에서 카피라이터가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잖아요.
설희재: 그렇죠. 제가 18년도 말부터 서울에 올라와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이제 2년 반쯤 지났네요.
김원세: 희재 님은 휴학도 오래 하셔서 대학 생활이 7~8년 정도로 비교적 긴 편이신데, 그와 비교했을 때 2년 반이라는 시간은 길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생활을 하시면서 농밀한 경험치를 축적하셨을 것 같습니다.
설희재: 제가 생각하는 대학생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효율’인 것 같아요. 떠올려 보면 대학생 때는 시간이 많으니까 일의 효율을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부딪쳤던 것 같아요. 열정적이었죠.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면 늘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잖아요. 오늘 아침에 회의하면 오후 4시에 다시 보자고 하고, 오늘 5시에 OT를 받았으면 내일 아침에 아이디어를 가져오자고 하고요. 그러다 보면 어떻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죠. 이건 일을 떠나서 삶 자체가, 제 라이프스타일이 ‘효율’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퇴근하고 7시에 집에 들어와서 12시에 잠든다면, 퇴근 후의 삶이 고작 5시간인 셈이잖아요? 그럼 이 5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까를 고민하는 거죠.
일하는 방식에서도, 다음에 이 일을 할 때 시간을 더 단축하기 위해서 데이터화를 해요. 레퍼런스를 저장할 때 나중에 이 레퍼런스를 찾기 쉽게끔 클로즈업 위주의 레퍼런스, 음악적 요소를 활용한 레퍼런스, 이건 감성적 소구 저건 이성적 소구 레퍼런스, 시네마 그래프가 들어간 레퍼런스 등 따로 보관하는 거죠. 나중에 광고에 활용할 때 ‘빨리빨리’ 찾을 수 있게끔 하는 거예요. ‘오늘은 광고에 영화 느낌을 줘야 하니까 시네마 그래프 레퍼런스에서 찾아야겠다.’ 했을 때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대학생 설희재와는 다르게 직장인 설희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거예요. 학생 때는 용서가 됐어요. 만족스럽지 않은 아이디어여도 그냥 들고 가요. 그렇다고 해서 저한테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그 아이디어를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직장인은 회의실에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집니다. 내 아이디어가 2시간짜리인지, 10분짜리인지가 다 공개되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같은 시간이라도 아껴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숙명이에요.
김원세: 흥미롭네요. 방금 말씀 중에 재미있던 것이 레퍼런스를 보관하신다는 대목인데요. 그렇다면 희재 님은 레퍼런스를 모으고, 일상을 기록하는 습관이 퇴근 후나 주말에도 가동되시는 건가요?
설희재: 그렇죠. 저는 넷플릭스에서 2시간짜리 영화를 볼 때도 좋은 대사를 입력하느라 4시간이 걸려요. 영화 대사를 따로 정리하고, 화면을 캡처하고, 좋은 글을 보고 들었던 내 생각을 다시 적다 보면 영화를 다 보는 데 4시간이 넘게 걸리죠. 그런데 2시간짜리 영화를 4시간 동안 보는 게 아까 얘기한 효율의 문제에서는 차이가 나잖아요? 하지만 이것도 효율적인 거죠.
김원세: 취미 생활을 하는 동시에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건가요?
설희재: 네. 그렇다고 해서 이걸 일에 반드시 쓰기 위해 저장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개인의 성향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느낀 지금의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는 게 싫어서요. 단순히 일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순간을 정리하고 난 뒤 읽어 보면 ‘오늘 진짜 좋은 거 건졌다. 와, 이런 생각의 폭을 내가 받아들였다. 나도 이제 이만큼 생각을 열어 볼 수 있겠구나.’ 싶은 거예요. 즉 영화를 보는 즐거움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즐거움이 동반하는 거죠.
김원세: 카피라이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네요. 오늘 SNS에서 희재 님의 소개 글을 봤어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떳떳하게 퇴사하기 위해 일합니다.” 일을 대하는 자세가 참신하고 새롭게 다가왔어요.
설희재: 이건 제가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인데요. 사람이다 보니 초심을 잃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면 마무리가 어떨까 싶더라고요. 처음의 뜨거웠던 마음이 식고, 점차 머리도 굳으면서 주변의 인정을 못 받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퇴사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픈 거예요. 그러기도 싫고요. 그래서 모두가 인정하는 가운데 멋있게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제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되는 거죠. 떳떳하게 퇴사하기 위해 일하는 거요.
김원세: 문제와 해결이 제대로 된, 광고인다운 목표 규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설희재: 제가 요즘 좀 그런데, 초심을 잃었거나 일에 열의가 안 들 때는 일하기가 싫죠. 고민하기도 귀찮고, 그냥 쉬고 싶어요. 그래서 그럴 때마다 제가 보는 영상이 있어요. 롯데 자이언츠 2군 훈련 영상이에요. 요즘 롯데 마케팅팀이 되게 잘해요.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2군에도 관심이 생긴 거죠.
그런데 2군들이 가진 목표가 딱 하나인 거예요. 많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부산 사직 야구장에 입장하는 것. 이 목표 하나로 매일 매일을 죽을 정도로 훈련해요. 제가 그걸 보면서 얼굴도 모르는 선수들이 너무 찡한 거예요. 팬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마음이 저릿저릿해요. 2군 감독이 래리 서튼이라는 외국인 감독인데, 그분의 인터뷰를 보고는 제가 감동해서 기록한 게 있어요. “만약 여러분이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삶을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나아질 것입니다. 챔피언의 마음가짐은 내가 위대하게 플레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기 위한 플레이를 하는 건 좋은 거죠. 그런데 이기려고 플레이를 하게 되면 상대가 약해도 만족을 하게 되잖아요? 어쨌든 이겼으니까. 그게 아니라 한 플레이 한 플레이를 내가 위대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승패를 초월하게 된다는 거죠. 그걸 보는데 소름이 쫙 돋아서 펜을 들었어요.
김원세: 그렇다면 ‘떳떳하게’라는 표현이 챔피언의 위치에서 퇴사하겠다는 거네요.
설희재: 네. 광고인으로서 위대하게 카피 한 문장 한 문장을 쓰려고요. 그런 태도를 지닌 내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카피를 만들고, 그게 결과물로 만들어졌을 때, 우리 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 내가 한 문장을 적기 위해서 들인 시간과 노력이 인정받게 되면 그게 카피라이터의 위대한 플레이인 것 같아요.
김원세: 희재 님은 이미 충분히 위대한 플레이를 하고 계실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에게 박수받으며 퇴사하시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다음으로 롤 모델을 한번 여쭤보고 싶은데요. 희재 님에게 좋은 기준점이 되어주는 롤 모델이 있나요?
설희재: 떠오르는 사람이 네 분 있네요. 제일 먼저 TBWA 박웅현 CCO님. 저는 어른이 된다면 그분처럼 되고 싶어요.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어른이요.
김원세: 제가 알기론 희재 님이 박웅현 님을 처음 접하셨던 게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라는 책이었잖아요? 그리고 2018년에는 TBWA 주니어보드에서 만나 그분의 수업을 실제로 듣기도 하셨고요.
설희재: 네. 그 책을 시작으로 그분의 책을 빠짐없이 다 읽고 팬이 되었죠.
김원세: 그렇다면 조금 유치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책을 통해 만난 박웅현 님이 멋진가요? 실제로 옆에서 지켜본 박웅현 님이 멋진가요?
설희재: 저는 실제로 본 박웅현 님이 더 좋아요.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뱉은 말과 쓴 글 그대로 사세요. 그게 꾸며낸 게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예요. 그래서 그 삶을 실제로 본다는 게 정말 놀라웠죠.
김원세: 박웅현 님을 동경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저도 꼭 만나 뵙고 싶네요. 또 다른 롤 모델은 누구일까요?
설희재: 저는 지혜를 가진다면 유시민 작가처럼 가지고 싶어요. 사물을 통찰하는 능력이나 핵심을 짚는 능력. 저도 그분처럼 많은 걸 알고 싶은 욕망이죠. 그리고 인생의 태도는 마이클 조던에게 배우고 싶어요. 운동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시야가 막힌 경우가 있는데, 조던은 다르더라고요. 넷플릭스에 마이클 조던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세요. 조던은 삶의 철학이 뚜렷하고, 그걸 실천하면서 살아요.
김원세: 조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기록한 것도 있을까요?
설희재: 이분이 한 말 중에도 멋있는 말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마지막 대사를 읽어 볼게요. “제가 코트 위에서 보인 열정은 전염성이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뛰려고 노력했거든요. 사람들을 위해서요. 딱 희망에서 시작했어요. 희망. 형편없는 팀으로 시작해서 역대 최고의 왕조로 거듭났죠. 필요했던 건 오직 하나예요. 자그마한 성냥 하나. 그게 불씨를 지폈을 거예요.”
누군가는 조던을 좀 으스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뭘 잘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갈고 닦아서 결국엔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존경스러웠어요. 우리는 좀 과하게 겸손하잖아요? 분명히 겸손은 필요하지만 과한 겸손은 자신감의 결여이고, 매사에 조심스러워질 것 같아요. 그러면, 일단 부딪쳐보는 용기를 잃고 주저하는 버릇이 삶의 태도가 되죠. 그래서 과한 겸손은 자제하자. 이 외에도 조던에게 배울 삶의 태도는 넘쳐나요. 정말로 멋진 사람은 나 자신이 잘난 사람이 아니라, 주변을 다 잘나게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조던은 같이 뛰는 선수들이 더 좋아했다고 해요. 조던에게는 분명히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나 리더십이 있었던 거죠.
김원세: 마이클 조던 다큐멘터리는 꼭 봐야겠네요. 그럼 마지막 한 분은 누구인가요?
설희재: 마지막 롤 모델은 업무적으로 닮고 싶은 저희 대표님입니다.
김원세: 아까 말씀하셨던 희재 님 회사의 대표님이자 팀장님인가요?
설희재: 네 맞아요. 저희 대표님은 화장품 광고에 화장품이 전혀 안 나오게 하는 게 최종 목표세요. 자유로우시고, 아까도 많이 말씀드렸지만 정말 멋있어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시죠. 대표님께서 저에게 “광고인일수록 나의 소신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이 알고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대표님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소신에 대해서 배워요.
김원세: 나의 롤 모델이 바로 옆에서 내게 영향을 준다는 것. 흔치 않은 경우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롤 모델 네 분과, 그 나름의 이유가 무엇보다도 희재 님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설희재: 저는 지적 충족에 있어서 게을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배움에는 끝이 없잖아요?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과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느 순간 만족해버릴 수도 있어요. 제가 여기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다고 인터뷰를 하고 나서는, 누워서 유튜브 보면서 하루를 보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기준이나 방향이 있다면, 어찌 됐든 저는 그쪽으로 흘러갈 거예요. 그래서 목표 설정이 중요하겠죠. 제 목표는 영화를 보다가 기록하고, 책을 사서 모으는 행위와 같이 ‘지성을 채우는 일’이에요. 저는 이쪽으로 흘러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