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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이 있잖아요. 우산을 쓰세요.

by ondo

여름에, 한여름에 비가 오면

장롱에 처박아 두었던 에코백부터 꺼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빨래통에 휙 던져 넣어도 될 만한 옷을 골라 입는다.

면 티셔츠와 서걱거리는 재질의 가벼운 바지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어차피 머리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러니 드라이기의 열풍과 빗질로 내 모류의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트느라 애쓰지 않는다.

오랜 시간, 내 머리를 컨트롤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왔다. 그러나 나는 깨달았다. 비 오는 날 내 모질과 모류에 맞설 수 있는 건 오로지 가발뿐이라고.

비의 기운을 흠뻑 빨아들인 내 앞머리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남성의 콧수염이 된다. 비가 내리면 나는 8자의 콧수염을 이마에 기른 멋진 사람이 된다.


비가 올 때 선택해야 할 것들은 더 있다.

옷장 앞에서, 현관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더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비를 염두에 두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비에 대비하는 자세는 그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마음이 평온하고 건강하면 비에 대한 대비를 좀 더 철저히 하게 된다.

얇은 카디건, 손수건, 휴지, 여분의 양말, 오드코롱 같이 비 올 때 챙기면 좋은 물건들을 미리 가방에 넣어놓고 나갈 때 한 번 더 점검한다.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한다는 건 마음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팔 한쪽 다리 한쪽도 들기 버거운 날이면 우산 하나 들고나간다.

마음의 근육이 소실됐을 땐 궂은 날씨에 정성껏 호응할 힘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친구나 직장동료가 유행하는 하이 레인부츠를 챙겨 신고 품이 큰 멋진 긴팔 셔츠를 두르고 에코백을 들고 커다란 우산을 쓴 걸 보면 마음이 좋다. 집에서부터 비를 염두에 두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대비한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무너진 상태는 아닐 테니까. 요즘 편안하니 다행이구나 생각한다.


오늘까지 은행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아침보다 더 많이 내렸다.

양쪽 어깨에 빗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인 물을 무심히 밟고 지나가지 않도록 사방에 신경을 쓰고 걸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손에 우산을 쥔 채 비를 맞고 있다.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걷거나 뛰지 않고 보통의 속도로 걸었다.

땅에 시선을 둔 안경 너머의 검은 두 눈이 텅 비어 보였다.

그는 어째서 우산을 펼치지 않는 걸까.

왜 우산을 들고 비를 맞는 걸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지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베이지색 얇은 체크무늬 셔츠가 젖어 안에 입은 러닝셔츠가 비쳤다.

남자의 등은 앞으로 살짝 굽었다. 땅을 보고 걷느라 허리가 둥글게 말린 것인지, 굽어서 그렇게 걷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색 운동화가 젖어 색이 까맣게 짙어졌으니 양말도 푹 젖었을 것이다.

그가 든 검은색 우산 꼭지에 모인 빗물이 땅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남자의 걸음에는 비에 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발이 움직이니 걷고 몸이 따라가는 것만 같다. 마음이 몸을 앞서버린 것 같다.


방금 전화로 무슨 비보라도 들은 걸까.

가족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걸까.

전 재산을 잃은 걸까.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걸까.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산을 손에 든 채 이 많은 비를 맞으며 보통의 속도로 걷는 것은 내게 마음이 기우는 일이다.

집 앞에서 우산을 펼치기 전에 무엇을 보았을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의 평온을 깨뜨린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열다섯 살 때 길에서 비를 맞는지도 모르고 비를 맞은 적이 있다.

엄마가 단정하게 결대로 말아놓은 작은 우산을 손에 꼭 쥔 채로 쏟아지는 비를 맞고 걸었던 시간이 있었다.


화요일 오후

쉬는 시간 마침 종소리를 듣고 봉지 밑바닥에 남아있던 러스크를 서둘러 입안 가득 털어 넣고는

입천장이 다 까졌다고 입을 아- 벌리고 제 빨간 입속을 내게 보여준 그 애가


웃을 때 얼굴과 목이 온통 빨개지는, 원색의 생기로 빛나는 그 애가


오늘, 수요일에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른 아침 아파트 화단에서 그 애의 죽은 몸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애의 빈자리를 두고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나는 학교를 나와 무작정 빗길을 걸었다.


다 자라지 않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감정이 나를 뚫고 들어왔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는 나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큰 질문들을 커다란 구멍 속에 가둔 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몸을 앞서서 걸었다.


세상에 나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지구에서 함께 사는 한 어떻게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을 찾아내어 연대의 대열에서 이탈하려는 사람을 꽁꽁 붙들어 매고 싶다.


우산을 펴지 않고 오는 비를 다 맞고 걷는 이들이 보이면 나는 슬며시 우산을 들이밀면서 비가 와요, 우산을 쓰세요, 우산이 당신 손에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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