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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좋은 헤엄

by ondo

우리는 그날 아침 택시를 타고 다낭에서 후에로 넘어왔다. 후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트남의 옛 수도라고 하니 천천히 걸어 다니며 볼 만한 건축물들이 꽤나 있을 테지만 우리는 베트남의 더위에 적잖이 당황해서 리조트로 바로 가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해 버틀러가 짐을 옮겨주고 나가자마자 남편은 허둥대며 에어컨 리모컨부터 찾았다.


베트남이 더운 나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더위에도 수준과 체급이 있다는 걸 여기 와서 깨닫게 되었다. 불이 온도에 따라 다른 발색을 내듯, 지구 각각의 여름에도 고유한 색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베트남의 여름은 조금만 더 기운을 내면 검어질 듯한 아주 짙푸른 색에 가까운 것 같았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야성의 녹색이랄까.


우리는 리조트 내부의 식당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눈이 동그래지고 미간이 좁혀졌다. 축축하고 무겁고 더운 공기를 몸속에서 내보내고 싶어서 숨을 크게 내쉬어보기도 했지만 잘 안 되었다.


잘게 부서진 얼음이 가득 든 용과 음료도, 식당 천장의 커다란 실링팬도 체온을 떨어뜨리는 데 소용이 없었다. 여행지에서의 모든 기대와 의욕을 꺾는 생소한 더위였다. 길에서 마주친 베트남 사람들이 왜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걷고, 슬로모션으로 부채질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더위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빨리 걷고 급히 뛰어다니면 분명 몸에 고장이 날 것이었다. 빨리빨리가 아니라 천천히천천히 대국민 캠페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더위였다. 몸에 탈이 나지 않으려면 몸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어야 할 것만 같았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중에도 목이 마르고, 오이와 토마토, 숙주처럼 식감에 개성이 뚜렷한 채소도 입에 넣자마자 가짜처럼 느껴졌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 중에 디톡스와 다이어트를 원한다면 5월의 베트남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베트남의 기온과 습도는 남다르다.


장난으로라도 내 더위 사라, 내 더위 사가라,라고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더위니까 그런 말은 여기에서 대단한 실례가 될 터였다.


우리는 꼭 나가야 할 일이 아니면 빌라 내부에 머무르기로 했다. 해가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슬리퍼를 신고 게으른 몸을 데리고 나갔다. 한 김 식은 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

투숙객 전용 자전거를 타고 리조트 안을 돌아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석호 위로 해가 떨어지며 붉은 낙조가 호수 위에 둥그렇게 드리워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일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한 곳에 dslr을 삼각대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일몰의 시간을 특별하게 생각한다. 끝과 죽음, 비관과 낙관의 가장자리를 늘 염두에 두고 사는 그에게 일몰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이 시간을 고요히 내어주고 싶어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왼쪽 눈을 감고 셔터를 착착 눌렀다. 그는 붉게 물이 든 석호의 풍경을 연사로 촬영했다. 왼쪽 눈가에 잡힌 그의 굵은 주름 다섯 가닥을 보고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때 나는 마음이 좋다. 좋아서 그가 더 좋아진다.


빌라 안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만화책을 읽거나 다운 받아온 영화를 보거나 졸거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수영장에 들어가 헤엄을 쳤다. 우리가 빌린 빌라에는 개인 풀이 딸려있었다. 숙소의 베란다 창을 열면 바로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렇게나 버리듯이 시간을 썼다.


나는 초록색 스트라이프 비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다가 블루투스 스피커로 라디오 헤드의 노 서프라이지스를 들었다. 회색 구름이 맞은편 빌라동에서 몰려오더니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나는 어쩐지 맨 몸이 되고 싶었다. 오로지 나의 피부로만 물의 출렁임과 온도와 고유의 결을 감각하고 싶었다.

“다 벗어볼까?”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도 조금 벌어졌다.

“왜?”

“그냥. 나는 벗고 싶은데. 다 벗을래.”

나는 물속에서 비키니를 다 벗어서 수영장 밖으로 던졌다.

남편의 눈이 더 커졌다. 입이 아래로 더 벌어졌다.

“누가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누가 보면 어떡해? “

“뭐 어때. 자기도 다 벗고 들어와. 이상해. 간질간질하고 소름이 막 돋아. 으으. “


나는 미끈한 몸을 가진 바다사자처럼 물속을 유연하게 뚫고 맹렬히 아래로 가라앉으며 헤엄치고 잠수했다. 물과 나 사이에 장벽은 얇은 피부막뿐.


내가 헤엄치는 모습을 만화 보듯 구경하는 그는 좀처럼 선을 넘지 못했다. 혹여나 조경하는 리조트 직원이 지나가다 볼까, 이웃하는 투숙객이 실수로 불쑥 들어올까 걱정이 많은 얼굴로 그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에라, 하고는 결심을 했다. 수영복 바지를 벗어던지고 풀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왔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깔깔 대고 웃었다. 젊은 나체 둘과 휴양지의 풀과 여름이라니 무언가 야한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지만.


태양 아래 나체는 에로스보다는 인체의 신비에 가까운 이미지랄까. 적나라한 몸의 생김새는 야하지 않다. 주름과 흉터와 점들과 변색과 군살은 야하지 않다.


우리는 대여섯 살 아이처럼 물장난을 치고 놀다가 자유롭게 헤엄치고, 물결을 고요히 느끼며 물 위에 둥둥 떠있었다. 야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낯설지만 좋은 헤엄이었다.





**배경화면 출처: 언스플래쉬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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