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여름방학이라 아이 등원용 차를 출퇴근할 때 쓸 수 있게 됐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려면 집에서 1시간 전에 나와야 하지만 차를 갖고 가면 30분이면 넉넉하다. 굳이 시간적인 효율을 따지지 않아도 정류장에 서서 달리는 차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매연을 마시며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괴로움, 중간중간 내리고 타고 걷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느니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하는 게 합리적이다.
차를 신체의 일부처럼 부리는 엄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다고 한다. 눈이 저렇게 오는데, 비가 저렇게 오는데, 세상에 날이 저렇게 궂은데, 어머나 날이 저렇게 좋은데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냐고 10분도 내겐 영원하다고 말한다.
나는 잠자코 듣지만 다른 생각을 한다. 걷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나는 웬만하면 어디든 내 다리로 걸어서 가고 싶다.
회사까지는 먼 거리라 어쩔 수 없이 차를 이용해야 하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일엔 걷기가 수반되니까 나는 운전을 하기보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싶다.
결혼 상대를 고려할 때 ‘즐거이 기꺼이 함께 걷는 사람’을 이상형 목록에 추가할 걸 그랬다.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걷고 싶다. 운동을 목적에 두지 않은 자유로운 산책자가 되고 싶다. 부지런한 워커, 성실한 워커가 되고 싶다. 걷고 걷다가 운동화 바닥이 마침내 닳아서 근처 신발 가게에 들어가 새 신발을 사는 날이 오면 기쁠 것 같다.
밑창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신발을 사야 하는 즐거움은 얼마나 클까.
회사에서 업무의 특성상, 초면이지만 무례한 사람을 상대해야 할 일이 더러 있는데 정 견딜 수 없는 날엔 운동화 끈을 꽉 묶고 편의점이라도 다녀온다. 환기를 하는 것이다.
단 5분이라도 계단을 걷고 바깥 거리를 걸으면서 내 두 다리에만 집중한다.
왼발 뒤꿈치로 땅을 먼저 딛고 다섯 개의 발가락으로 땅을 가볍게 터치해 올리며 한 발짝을 비로소 완성하는 그 행위에 마음을 집중한다.
호흡이 중요하다. 코로 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아랫배에 공기를 가득 채운 후에 입으로 훅-훅- 하면서 짧게 나눠 뱉는다.
호흡과 걷기에 집중하면 어느새 괜찮아진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무언가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운전을 하면 차와 도로에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하니 자유롭지 못하다.
버스를 타면 책을 읽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구독 중인 브런치 글들을 집중해서 읽는다. 아니면 창밖 풍경을 보거나 이상한 사람들을 구경한다. 멍하게 있을 때도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차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하지만 나는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되었구나, 생각한다. 한숨 돌리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대중교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첫 번째 걷게 되는 것, 두 번째 버스 안에서 나만의 ‘이동식 휴가’를 보낼 수 있다는 것.
버스를 타러 가면서 듣는 음악, 정류장에서 짬짬이 보는 뉴스와 영상들, 버스 안에서 40분 정도 할 수 있는 독서와 기도와 공부 그리고 멍-.
요즘 같이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엔 정류장까지 걸으면 겨드랑이가 젖고, 숨이 가쁘지만 기다리던 버스에 오르면 이동식 피서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짧은 40분간의 ‘베이케이션’을 어떻게 즐겨야 하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이 된다.
나는 건강한 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산책자로서 기꺼이 버스를 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