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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by ondo

이 집은 전국 평양냉면 맛지도에 있고, 평양냉면 덕후라면 당연히 와봤을 집이며,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평양냉면 원류이다.


이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매년 여름이 되면 이 냉면집을 찾는데 이유는 정말 그 슴슴한 행주 삶은 듯한 차가운 육수가 여름이 되면 불현듯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며칠째 먹고 싶어서 각 잡고 먹고야 마는 게 아니라 갑자기 뜨거운 콩나물국을 떠먹다가, 맥주 안주로 땅콩을 오도독 깨물어먹으면서 아, 평냉! 내일은 꼭 평냉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냉면을 먹으면서 기 막히게 맛있다, 입에 착착 감긴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 맛을 나는 또 찾게 되는 것인가.


슴슴한데 묵직한 한방이 있는 육수 때문인가. 입에 넣자마자 혀에 착 붙는 가볍고 발랄한 맛이 아니라 목구멍을 퍽 치고 내려가 무겁게 위장을 누르는 그 한방?

아니면 꼬들꼬들한, 아니 약간 뻗대는 느낌의 몹시 매력적인 식감의 메밀면 때문인가. 고춧가루와 파와 수육의 조화로운 맛 때문인가.

이제야 알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뭔 맛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아... 또 먹고 싶다 생각하는 건 나도 평냉 중독의 입문에 선 게 아닌가 최종 판결. 땅땅땅.


“과장님, 이제 진짜 여름인데 평냉 하러 가시죠.”

과장님은 늙은이가 젊은 애들이 어디 가자고 할 때 자꾸 튕기면 외로워진다면서 그러자고 한다. 옆 부서, 앞 부서 친한 직원들에게 소문을 좀 내었더니 무려 8명이나 손을 든다. 우리는 단톡방을 꾸려 비장한 각오로 2025년 제1차 평냉 원정대 출정식을 준비한다.


대기 안 타려면 몇 시에 나가야 하나요? 11시 30분 출발이 좋은데 부서장이 허락할까요? 어림도 없을 걸요. 그럼 45분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줄은 좀 서겠지만 좋습니다. 정확히 11시 45분, 차 두 대로 출발합니다. 우르르 나오지 말고 한 명씩 나오세요.


출발 시간과 차량까지 계획하고 나니 거냉을 먹을지 오리지널로 먹을지 고민이 시작된다. 거냉은 냉함을 제거한 냉면으로 여전히 냉면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육수가 실온에 가까워 육수의 맛을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평냉은 먹고 싶은데 장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오늘만큼은 비냉을 먹어야 하는 기분 아닌가 싶을 때 거냉을 택한다. 메뉴엔 없다. 칠팔월만 되면 이틀에 한 번은 평냉을 먹어야 평정심을 유지하는 상사가 알려줬다.


출정식은 비밀스럽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화장실과 탕비실에 가는 식으로 한 명 두 명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1층(위에서 내려다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시동을 걸고 미리 대기 중인 차량에 a조 b조로 나뉘어 탔다. 한마디 말없이 사무실에서 탈출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각 차에 타는 과정이 매끄럽다. 출발이 좋다. 정확히 11시 45분에 회사를 떠난다. 10분이면 냉면집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냉면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기도 전에 엉덩이가 들썩이고 목이 창 너머로 꺾일 지경이다. 여기다. 여기부터 질주할 구간이다. 주차하고 줄을 서면 건물을 빙 돌아 후문에 가까운 곳에 줄을 서야 한다.


“내려줘! 내려줘! 아냐, 아냐. 여기서 내려줘!”


나는 차문을 쾅 닫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의 코너를 돌아 무작정 뛴다. 열 발자국 앞에 넥타이를 맨 남자 둘과 H라인 스커트를 입은 여자 셋도 탁탁 탁탁 구두굽소리를 내며 가볍게 뛰고 있다. 목에 건 사원증이 양옆으로 휘날린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왔다. 깃이 있는 단정한 블라우스를 입고 턱이 잡힌 정장 슬랙스를 입었지만 사무실에서 러닝화로 갈아 신고 왔다. tpo고 뭐고 오늘은 달려야 하는 날이니까 나는 불균형한 내 패션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내 앞에 직장인들은 무조건 제쳐야 한다. 아니면 내 동료들이 사무실 복귀 시간에 쫓겨 올해 첫 평냉을 음미할 만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대단히 큰 책임감을 어깨에 얹고 보폭을 넓혀 뛴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먹 쥔 손을 몸통 앞뒤로 크게 흔들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달린다. 앞에 달리던 다섯 명이 뒤쳐진다. 아이씨이- 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린다.


아아- 피로가 느껴지지만 성취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대기 일곱 번째다. 홀 좌석이 적지 않고 테이블 회전율이 빠르니 12시가 되기 전에 입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뒤에 줄을 서야 하는 그 다섯 명의 직장인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흘겨보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저 앞쪽에서 우아하게 걸어오는 내 동료들에게 휘적휘적 손짓한다.


정확히 12시가 되니 젊은 사장님이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한다. 홀에 입장하자 마치 여름 성수기이면서 주말에 워터파크 안에 있는 목욕탕에 들어온 것만 같다. 옆 사람의 이야기도 손을 옹그려 귓속말로 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 홀의 벽을 때리고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을 탱탱 치고 귀에 되돌아온다.


“와 정신없어. 뭐 드실래요? “


서빙 직원이 종이와 펜을 들고 우리 테이블 옆에 섰다. 이 집엔 유니폼 외에 머리손질법, 화장의 매뉴얼도 존재하는지 서빙을 하는 중년 여성의 외모가 비슷하다. 동그랗게 올림머리를 하고 정수리에 일명 ‘뽕‘을 가득 넣었다. 눈 화장법도 같다. 인조속눈썹을 낱개로 붙이고, 연보라색 아이섀도를 발랐다. 기계적으로 주문을 받고, 저 반찬… 더 달라는 요청의 말을 맺기도 전에 무절임 그릇을 턱턱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이들은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고 그저 빠르고 정확하게 메뉴를 체크한 뒤 돌아갔다. 지금 먹고 있는 사람, 앞으로 먹을 사람, 더 먹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그릇을 놓고 치우고 반찬을 채우고 소주병을 놓고 깨진 잔을 바꿔주느라 친절이고 불친절이고 뭘 하려야 할 시간이 없다. 그저 이 엉망진창 난리법석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듯하다. 이 집의 여름날 점심시간은 전쟁터이다. 직원들은 올해는 처서가 도대체 며칠인지 커다란 달력을 몇 장씩 넘기면서, 아직도 멀었네, 멀었어,라고 한숨 지을지 모른다.


우리는 거냉 둘, 일반 다섯, 비냉(이 사람아 비냉이라니…) 하나를 시켰다. 주문한 지 5분 만에 커다란 스텐 주발에 담긴 냉면이 테이블 위에 탁탁 놓였다. 여기서 평양냉면 좀 먹어봤다는 꼰대의 말이 시작된다.


“면 휘젓지 마. 젓가락 내려놔. 그릇을 들어서 육수를 들이켜. 이렇게 맛을 봐. 그러고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서 그 위에 식초를 살짝 뿌려. 먹어봐.”


직원들이 이 평냉 러버 꼰대의 젓가락질을 힐끔 보더니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모두 얼굴을 냉면 그릇에 처박고 면을 젓가락으로 올려 입속에 욱여넣는다. 육수까지 위장을 채우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하는 게 불가능한 곳이니 모두 ‘식’에만 집중한다.


“근데 육수 간이 좀 세지지 않았어요?”

“맞아요. 제가 먹고 맛이 괜찮다 싶은 거면 짜진 건데.”

“이 집 후계자가 평생 엄마한테 그게 불만이었네. 간. 그러니 이렇게 간간해진 거 아냐?”

“그러게. 아들이 사장되면서 간을 리뉴얼했네. 아쉽다. 그 전이 더 담백했는데.”

“아냐. 난 이게 더 입맛에 맞는데? 맛있는지 맛없는지 내 미각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잖아. 여기 맛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다들 내 입맛을 싸구려 취급하더라고.”


나는 남은 면발을 씹으면서 역시 아무 맛도 아닌 그 맛이 더 낫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역시나 모르겠고 그냥 평냉 중독자의 초기 증상이겠거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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