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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쏘한 여름과

by ondo

나와 결혼한 남자는 돌멩이 같은 사람이다. 그의 기분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아리송할 때가 많다.

기분 좋아? 물어보면 그냥 쏘쏘해,라고 하고, 기분 안 좋아? 물어도 그냥 쏘쏘해,라고 답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으니 이제 나는 그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다. 본인은 모르는 시그널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팔다리를 작게 출렁이며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안 좋으면 코를 한 번 씰룩이다가 흐읍-하고 마른 코를 들이마신다.


그의 평시 기분을 굳이 따지자면 업보다는 다운 쪽이다. 연애할 땐 그런 면이 점잖고, 성숙해 보여서 매력적이었는데 결혼생활을 해보니 살짝만 업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때로 그의 양 어깨에 풍선을 잔뜩 매달아서 하늘로 띄워주고 싶다. 땅에 붙이고 선 두 다리가 무거워 보인다. 눈꼬리도 입꼬리도 살짝만 위로 올려주고 싶다. 중력을 거슬러 바짝 올라간 얼굴을 보면 나도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다. 그에게 거꾸로 서기라도 연습하라고 해야 할까?


티라미수를 먹을 때 그를 생각한다. 티라미수가 이태리어로 나를 끌어올린다는 뜻이라는데 그를 ‘티라미수‘할 수 있는 게 뭘까 평생 고민하는 게 나의 업인가 싶고, 그게 동반자로서의 사랑이 아닌가 싶은 거다.

나도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사람인데 굳이 따지자면 다운보다는 업 쪽이다. 나는 업돼서 나대고 시끄럽게 웃거나 행동을 크게 하는 쪽은 아니지만 속마음은 환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내가 밝은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네가?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강조한다.)


긍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는 ‘평시‘가 아니라 ‘전시‘에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땐 누구나 밝다. 문제는 살면서 좋은 일은 이벤트성으로 일어난다는 거다. 우리의 일상은 거의 비슷한 일과 시간으로 채워지고 가끔 통제불가능한 나쁜 상황이 닥치고, 아주 가끔 좋은 일, 행운이 들어온다.


나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진짜 밝은 사람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밝은 사람이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이 또한 지나간다고 곧 받아들이고 현실을 살기 때문이다.


아빠가 지난주에 커다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조직검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내게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해 왔다. 나도 부모님도 늙고 있으니까 늙으면 병이 들고 아픈 게 자연의 이치니까.


요즘은 저속노화가 유행이다. 최대한 노화를 늦추기 위해 가공된 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설탕을 줄이고, 통곡물과 채소를 먹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외국의 어떤 돈 많은 사업가는 아예 아들의 피를 수혈받는 실험을 한다고 한다. 사진으로 본 그의 얼굴은 청년 같긴 하다. 속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늙고 싶지 않고 아프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러나 생명으로 태어나면 생로병사의 단계는 무조건 거치게 된다. 일주일 사는 매미도, 15년을 사는 개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런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내가 태어난 이상 내게 세팅된 고통의 값은 예정되어 있다. 건강과 자녀 문제, 재산, 직업, 불의의 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가 파도처럼 내게 올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친다. 이런 고통을 내게서 치워달라고, 제발 빗겨 나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과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날 지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으로의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 평정심을 유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행운이 왔다고 너무 기뻐할 것도 불행이 왔다고 너무 비탄에 빠질 것도 없이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으니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안 좋은 일이 있으니 또 좋은 일이 언젠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이 수술을 받고 종양의 정체가 무엇인지 기다리는 초조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일을 가고,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다 쓴 샴푸를 사러 마트에 간다.


오늘 아빠와 아빠를 간호 중인 엄마를 병원 로비에서 잠깐 보고 왔다. 바나나와 황도와 샌드위치를 건네며 내 부모의 등과 손과 마스크 아래로 삐져나온 긴 털을 보았다. 늙은 부모의 모습을 보며 슬퍼지는 내 마음도 어쩔 수 없다고 다독이며 병원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별 말이 없는 남편에게 물었다. 나는 남편의 기분을 자주 살피는 아내다. 서로의 페이스메이커라고 생각하니까.


“지금 기분 어때? 괜찮아?”

“나? 쏘쏘. 그냥 쏘쏘해.”


신혼이었다면, 맨날 쏘쏘한 이 양반,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을 텐데 나는 오늘 쏘쏘한 그의 기분에 위로를 받았다.


쏘쏘한 남편 덕분에 나는 밝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닌지, 알고 보면 다 그의 덕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족이 아프고, 직장 상사에게 뒤통수를 맞고, 지옥철을 타는 매일이 쏘쏘하다는 것, 쏘쏘한 기분으로 집에 오고 운동을 하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들고 일상을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는 슬프다고 술을 마시거나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일탈하지 않는다. 비슷한 일주일을 살려고 애를 쓴다.

나는 그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고 존중한다.


이번 여름은 soso한 여름이다. 아주 좋은 일도 아주 나쁜 일도 없이 내일이면 9월로 건너간다. 올해는 윤달이고 음력으로 이제 7월에 들어섰으니 아마도 조금 더 덥겠지만 해가 진 뒤 기온이라든가 습도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비록 아빠가 아프지만 수술이 잘 되어 회복 중이고, 직장에서나 아이의 건강면에서나 집안에서나 별다른 배드 뉴스 없이 여름을 잘 통과하고 있다.

쏘쏘한 여름을 지나 쏘쏘한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고 통과할 수 있도록 오늘도 묵주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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