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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by ondo

중학교에 입학해서 내가 배정받은 반에 두 진실이 있었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진실로 같은 둘은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금세 친해졌다. 서로를 “진실아”라고 부르며 까르르 웃는 그들과 내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들 뒷자리에 앉았거나 너희들은 왜 최진실과 얼굴이 그토록 다른 거냐며 되지도 않는 농을 걸다가 친해졌거나. 잘 모르겠다.


우리는 봄볕에 충분히 데워진 공기가 교실 창으로 채 틈입하기도 전에 비밀일기장을 만들어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일기를 쓰고 돌려 읽었다. 말이 일기지 그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우정을 맹세하는 증표에 가까웠다. 일기장엔 너를 향한 나의 우정과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증명하려 애를 쓰는 흔적이 가득했고 마지막엔 서약을 하듯 꼭 ‘포에버‘로 글을 마무리했다.


우리 우정 포에버 하트 하트.

우리 사랑 포에버 하트 하트.


그 시절 포에버한 우리의 사랑과 우정은 성역과도 같아서 셋 말고는 누구도 함부로 침범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얼 안다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까 싶다. 그건 2차 성징 호르몬의 샤워로 인한 충동성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고, 우리 안의 결속력과 무리 안에서 내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은 강렬한 감정 그 자체일 수 있고. 아무튼 그때는 그들을 향한 사랑의 단서를 찾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낄 때였으니까 우리의 감정은 진실했다고 할 수 있다.


‘포에버‘의 유효 기간은 길지 않았다. 두 진실 중 하나가 1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셋이 이루었던 안정적인 우정의 균형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학을 간 진실은 말간 얼굴로 미소 지으며 뭐든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일면 독특하고 모난 성질을 가진 나와 또 다른 진실이 일으킬만한 갈등을 흡수해 주는 쿠션 역할을 해왔었다. 나와 남은 진실은 몇 차례 비밀일기를 교환하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멀어졌다. 셋이 아닌 둘이 친구가 되는 건 다르니까. 우리는 성급히 다른 무리를 찾아서 포에버한 우정을 그들에게 다시 맹세했다.


몇 해 전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 진실을 만났다. 떠나간 진실이 아닌 남은 진실을. 그 애가 나를 먼저 알아봤다. 20년 만에 만난 진실은 나를 야,라고 불렀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은 그 당시 우정과 사랑의 포에버한 맹세에 무색한, 시간의 부스러기 같은 말들이었다. 지금 뭐 하냐, 결혼은 했냐, 직장은 어디냐 같은 당신에 대해 진짜 알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묻는 것들. 그 애가 뭐라고 대답을 했었나. 결혼은 안 했고, 직장은 어디에 있다고 했더라. 서울 어딘가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애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만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그 애랑 결국 친해지지 않아서, 나와 결이 맞지 않아서 결국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지나온 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친했든 친하지 않았든 만난 사람들과는 결국 헤어지게 된다는 것.

회자정리.

떠나가는 사람이 회자정리를 말할 때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우리는, 우리만은 다르다고 말했었다. 우리의 관계는 특별하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고 다짐하고 큰 소리도 쳤지만 결국 멀어지고 헤어졌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한다고 해도 마음까지 고요한 건 아니다. 곧 떠날 사람 앞에 서면 지금도 구멍이 난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다.


작년에 정년퇴직 대상자인 직장 동료 영이 상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영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직장동료로서는 존경하기 때문에 오래오래 함께 일하기를 바랐지만 영은 돌연 복도에서 만난 우리에게 회사 측의 통보로 올 12월까지만 근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인연은 12월까지인 걸로. 다 손절이야. 인간관계 끝. 결국 그렇게 돼.”


몇몇은 서운하다며 그런 말씀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에 그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입이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일 볼 수밖에 없어 보게 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우연이고 특별한 인연인가. 그 대단한 인연이 또다시 끝을 앞두고 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한두 번은 동료들이 모여 그의 집 앞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저렇게 이어가다가 결국에 우리는 서로에게 지나간 사람이 되겠지. 끝이 나는 시간을 알 수 없을 뿐 모두의 종착점은 다르고, 우리는 결국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무얼 할까. 살아있다면 자기 앞의 생을 사느라 분주할 것이고,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이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 막 입학해서 들어간 대학방송국에서 모꼬지를 갔는데 까마득하게 높은 학번의 선배이자 ‘국장’이었던 오빠가 바다 앞에 선 내게 목도리를 야무진 손길로 둘러주며 말했었다.

“앞으로 빡셀 거야. 모르는 건 물어봐. 욕먹더라도 물어보는 거야. 니들은 그래도 되는 때야. “

그의 부드럽고 단단한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한데 그가 세상 너머로 간 지 10년이 넘었다. 그는 대상포진이 뇌에서 발병해 손 쓸 새 없이 세상을 떠났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진 후배와 함께 병원을 다녀온 뒤 그의 자취방에서 미역국을 끓여주고 그 애를 한참 안아주며, 내게 기대라며 등을 쓸어주었는데 지금은 그 애의 성이 ‘이’였는지, ‘김‘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세상이 온통 서로 뿐이었던 시간이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지나가버렸다. 때로는 내가 무심해서,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책했던 시간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 그렇다는 걸 안다.


이제 영과 헤어질 시간이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끝을 알아서 서글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 기쁨은 차분한 기쁨이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영의 사무실에 들러 일상적인 안부 인사를 건네며, 헤어질 결심을 새로이 한다.


헤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가 내게 건넨 다정한 말들과 유럽여행지에서 사 온 도자기 종과 사경을 헤매는 불우한 교우를 도우라며 슬며시 내 손에 쥐어 준 5만 원의 감촉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이 들어설 다른 길의 인생을 조용히 응원하며, 매일 그와 조금씩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다.

안녕, 영.

부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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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