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귀여운 작당

오, 산타!

by ondo

1991년 크리스마스이브. 당시 우리 가족은 단독주택 2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열두 평이나 되었을까.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땐 다섯 식구가 벽에 등을 붙이고 거실에 동그랗게 둘러앉았는데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옆 사람의 등을 살짝 앞으로 제치고 지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좁은 집에 산타가 어떻게 들어올지, 들어온다면 어디로 들어올지 걱정이 됐다. 진입을 여러 차례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음 어린이의 집을 찾진 않을까 생각하면 잠결에 몸이 까부라지다가도 정신이 번쩍 났다.


집에 굴뚝은 당연히 없고, 들어올만한 창문이라곤 부엌에 난 작은 창뿐인데 산타 얼굴도 집어넣지 못할 것 같았다. 그 큰 엉덩이를 어디로 들이밀어야 들어올 수 있을까. 차라리 벨을 누르고 문으로 당당히 들어오는 게 낫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밤이었다.


점점 이마와 겨드랑이가 따끈해지고 눅진한 진땀이 베개에 스며들었다. 나는 오한이 드는 느낌이 들어서 두꺼운 솜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한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방문 틈으로 커다랗고 둥근 그림자가 거실 바닥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게 보였다. 나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고 몸을 천천히 일으켜 문 뒤에 몸을 숨기고 틈을 바라보았다.


빨간 산타복을 입은 초고도 비만 외국인의 하관을 빼곡히 채운 곱슬곱슬한 흰 수염이 작은 부엌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빛나며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산타는 콧등 아래로 흘러내리는 황금빛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슬쩍 올린 뒤 나와 동생이 간밤에 거실 구석에 만들어놓은 작은 트리 밑에 선물 박스를 내려놓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살금살금 기어서 이부자리로 되돌아가 얼굴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몸이 덜덜 떨려서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딱딱딱 났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청난 장신에 기골이 장대한 먼 나라의 외국인이 우리 집에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산타를 보게 되어 기쁜 마음보다 두려운 마음에 몸이 떨렸다.


나는 그 당시 산타는 어쩌면 없을지 모른다는, 어른이 만들어낸 동화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나름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해인가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와 같은 포장지가 엄마 화장대 아래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역시나 했던 마음이 커져있을 때라 그랬을 것이다.


혹시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역시 없겠지, 하는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울 때 그의 등장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논란의 종지부를 맺는 극적 순간이었다.


언제 다시 잠이 들었을까. 나는 엄마의 물기 있는 차가운 손이 내 이마를 짚을 때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안방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 밤이야? 아침이야?”

“해가 중천이에요. 밤새 끙끙 앓더라. 죽 끓였으니까 얼른 먹고 약 먹어.”


나는 새벽에 본 산타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말해봤자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고, 영원히 혼자만 알고 싶기도 해서 결국 이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아이가 며칠 전 내게 물었다.


“엄마, 작년에 형아들이 그랬어. 산타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대. 산타가 아니라 사실은 택배 아저씨래.”

“세상에. 형아들이 산타를 아직 못 봤구나. 엄마는 산타 진짜 봤어. 엄마 어렸을 때 산타가 집에 들어와서 트리 밑에 선물 놓고 가는 거 봤어.”

“진짜?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 아니야. 키가 엄청 크고, 배가 이렇게 나오고, 동그란 안경 쓴 외국인 할아버지 엄마가 진짜 봤어.”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며 까만 눈이 반짝였다.


그게 내가 열에 들떠 본 환상이었는지, 꿈이었는지, 내 눈에만 보인 천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엄밀히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본 것을 보았다고 했을 뿐.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엔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산타의 면허증을 트리 바닥에 떨어뜨려놨었다. 썰매 면허증이었나, 산타 영업허가증이었나 아무튼 아이들은 충분히 믿을 만한 극적 무대 장치라고나 할까. 실제로 아이는 산타 사진이 박힌 면허증을 주워 들고 내게 건네며 이 어리바리한 산타의 앞날을 걱정했었다. 면허증이 없으니 썰매를 영영 끌 수 없는 거 아니냐며.


나는 아이에게 산타마을에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산타에게 카드를 써보자고 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네모나게 오려서 앞면에 산타를 그리고 뒷면엔 메시지를 적었다.


산타할아버지!

저는 한국에 사는 달이에요.

이번엔 네모난 드론을 꼭 갖고 싶어요. 이렇게 편지까지 보내니까 까먹으면 안 돼요. 절대요!

사랑해요.


아이가 한국어로 적고 내가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번역된 핀란드어로 병용해 넣었다. 인터넷에 핀란드 산타마을을 검색하면 주소지가 나온다. 핀란드에 실제로 산타마을이 있다. 이곳에 200여 개국의 어린이들이 3백만 통의 편지를 보낸다고 한다. 3백만 통은 하루! 평균 도착하는 수다.

그런데 놀랍게도 10월 말일까지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보내면 내년에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조금 아쉽지만 잊고 있다가 내년에 깜짝 선물로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회사 근처 우체국에 들러 편지를 부치고 나오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얼마나 어린이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에 대해.


12월 24일엔 핸드폰으로 산타추적기도 검색해 볼 수 있다. 산타의 썰매가 지금 세계의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우리나라엔 몇 시쯤 도착할 예정인지 레이더망에 표시가 된다. 실제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에서 제공하는 크리스마스 기념 이벤트이다. 70주년을 맞이할 정도로 오래된 연례행사라고 한다.


이 이벤트를 준비한, 각 잡힌 군복을 입은 어른들의 귀여운 작당을 상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쩌면 아이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이런 일들은 우리 어른들,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동심, 나의 순수함, 세파에 노출되지 않았던, 셈도 없고 계산도 없었던 있는 그대로의 나, 꼬마 영혼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아닌가 하는.


나는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며, 또 어떤 작은 이벤트를 벌일까 남편과 작당을 해보려고 한다.


아! 지난해 부주의한 초보 산타가 흘리고 간 면허증부터 먼저 찾아야겠다.





keyword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