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Aug 17. 2024

오늘도 나마스떼

오늘 만난 사람

나는 전화 통화가 불편하다.

내게 전화의 쓸모는 ‘용건만 간단히’다.

전화로 일상을 이야기하고, 요즘 고민을 토로하고, 감정을 주고받는 일은 어렵고 낯설다. 사회적 거리가 없는 가족이나 연인 사이라도 그렇다.

콜포비아까진 아닌데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의 의미를 유선으로 전달하는 데 불안함이 있다.

소통에서 표정이나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도 중요한데 유선상으로는 오로지 말로 전달해야 하니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할 때, 특히 모르는 이에게 하는 경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

대화에서 실례가 될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은 깎아내고, 존중을 표현할 수 있는 데선 살려 말한다.

 “실례지만”,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다면 “ 같은 겸양 표현도 자주 쓴다.

전화 업무를 볼 때뿐만이 아니고 사사로이 음식 배달을 시키거나 병원 예약을 잡을 때도 그렇다.


그런데 나의 이런 전화 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화선 뒤에 숨어서 나의 친절과 존중을 하대의 발판으로 삼는 이들이다.

젊은 사람들보다 중장년층이 통계적으로 많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더 무례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전화 소통에 더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도 중년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날이 서있었다.


“왜 이렇게 남의 사생활을 파헤치려고 해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


“... 선생님, 기본 인적 사항인데 저희가 그런 정보도 없이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


“그러니까 왜 한 여자의 인생을 그렇게 들쑤셔놔야 하냐고? “


이때부터 여자는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로 모노드라마를 극에 올렸다.

개인사라 밝히기 어렵지만 업무상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비극적인 일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대가 지나치게 흥분해 있어서 중간에 끊기도 무엇해서 살그머니 수화기를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내가 입사해서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경력이 붙을수록 살 궁리를 하다 보니 악다구니는 안 듣는 편을 택했다.

수화기에서 왕왕 대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 다시 집어 들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선생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네요. 저희가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접수하셔요. “


감정에 대한 수용이다. 인정이라기보다는 ‘그렇구나.‘ 받는 것이다. 별 거 아닌 대응 같지만 ‘그렇구나 ‘의 효과는 크다.

여자는 그제야 울었다.

그러고 나서 “좀 시원하네. 이제 좀 풀리네요. “라고 말했다. 음성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서류를 다시 준비해서 연락하겠노라 생기 있는 목소리로 전화 용무를 마쳤다.


여자는 감정을 배설했으니 시원하다고 했지만 내 속은 속이 아니었다. 감정의 풍선효과다. 상대가 배설한 감정 쓰레기는 어디로 가겠는가? 내게 버렸으니 나의 감정 쓰레기통에 들어찰 수밖에. 퇴근하기 전까지 몇 명은 더 만나고 상담해야 할 텐데 큰일이다. 업무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한 사람이 내 쓰레기통 용량의 반은 채웠으니.  




결국 이날 내 안의 감정 쓰레기통은 용량 초과로 넘쳐버렸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넘친 쓰레기를 가족에게 던져버릴 수도 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해소 방안을 찾아야 했다.


퇴근길에 전봇대에 붙은 요가원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픈 기념으로 3개월을 끊으면 1개월을 덤으로 준단다. 나는 용두사미 타입이지만 단김에 빼는 건 선수다. 바로 요가원을 찾아가 수강 등록을 하고 당일 수련에 들어갔다.

몇 년 전에도 1년간 요가를 한 적이 있지만 실력이 영 늘지 않아 여전히 초심자와 다를 바 없다. 몸이 유연하지 않은 건 마음의 자세와도 연관이 있는 걸까?


비둘기 자세, 코브라 자세, 활 자세 등 뭘 해도 뻣뻣한 나무토막이 따로 없다. 전면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는다. 안되는데 되게끔, 닿게끔 용쓰는 내 모습이 우스워서 집중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가는 잘 못해도 좋다. 고요히 내 안을 바라보는 시간이고, 자세와 호흡에 집중하느라 잡념을 밀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게는 사바아사나(송장 자세)가 수련의 정점이다.

요가 수련의 마무리 자세로 모든 수련자들이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숙련자들은 사바아사나가 요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자신의 호흡, 심신에만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불이 꺼지고 강사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을 감습니다. 깊은 잠에 빠지듯 휴식합니다. ”


대애앵-.

싱잉볼이 공기 중에 진동하며 울렸다.

사바아사나를 마치고 눈을 떠 몸을 옆으로 돌려 천천히

일어났을 때 오늘의 기억이 많이 씻겨나간 것을 느낀다. 쓰레기통이 많이 비워진 듯 가볍고 깨끗해진 나를 마주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반드시 “나마스떼!”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을 위하여.







이전 03화 사직서 대신 아인슈페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