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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14. 2024

사직서 대신 아인슈페너

오늘 만난 사람

여자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삼십대 초중반으로 뵈는 젊은 여자인데, 잔뜩 좁혀진 미간에 벌써 녹록지 않은 인생의 무게가 얹어져 있었다.

나는 업무상 찾아온 ‘손님’을 보면 뒤이어 일어날 일을 암시적으로 느낀다. 그것은 감각보다 직관에 가깝다.

내게 그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 같은 시각적인 신호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를 감도는 공기로 단번에 들어온다.

무겁고 불안정한, 불안에 휩싸인 특유의 공기.

그 여자는 내가 톡 건드리면 뭐든 이내 쏟아부을 태세로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 안내를 할 때까지는 별말 없이 따라오기에 오산이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쌓인 직관의 잠재의식은 허상이 아니다.

접수비용을 안내하자마자 지폐 두 장이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펄-럭-.

곧 내 얼굴을 스쳐 공중에 흩날리더니 바닥에 내려앉았다.

돈의 거북한 냄새가 코끝에 스치더니 곧 멀어졌다.  


“아이씨, 내가 이런 상황에서 돈까지 내야 돼? “


“어머, 얘가 왜 이래?”

같이 온 여자의 엄마가 어린애를 달래듯 여자의 등을 쓸어주며 토닥였다.


- 정적 -


생각해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우리 아들하고 당장 헤어져! 얼마면 돼?”

가난한 여자에게 돈 봉투를 던지는 사모님을 tv 드라마에서 봤다. 클리셰다.

나도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때가 있다니.

손바닥으로 뺨을 맞아본 적도 없는데 돈으로 맞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멍-.


벌컥 화를 내야 할까?

위압적인 태도로 당장 나가라고 할까?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마무리 짓고 빨리 내보낼까?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저 돈은 어쩌지?

지금 주워야 하나? 지금 쭈그려 앉아서 돈을 줍는 건 상당히 모양 빠지는데.

이 상황을 최대한 매끄럽게 풀어내고, 이 분위기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끝도 없는 물음표를 찍고 답을 찾았다.

그런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도통 갈피가 안 잡혔다.

실제는 불과 1~2분이었겠지만 나의 세계에서 시간이 영영 사라진 것 같았다.


얼굴에 돈 던진 빌런은 난생처음이라 나의 대응 매뉴얼에 없어서 난감했다.

나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고형 인간이다. 해결책이 매뉴얼에 없으면 당황한다.

그다음에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민원은 정상적으로 접수되었다.


그 여자와 일행이 일을 제 뜻대로 마치고 나가며,

“수고하세요.”라고 말했다.

수고라니.

수고라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차오르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화를 내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한데 나는 만날 남들보다 반응이 늦돼서 화를 낼 때 못 내고 집에 와서 이불을 걷어찬다.

실컷 화라도 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같이 대거리를 해야지, 넌 입이 없냐?

바보.

속이 탔다.


사무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의 냉동실 문을 활짝 열어 머리를 쑤셔 넣었다.

하아-. 내일은 진짜 사직서 낼 거야.




어영부영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토록 엉클어진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회사 근처 카페에 들렀다.

아인슈페너를 시켰다.

여긴 이 근방에서 아인슈페너를 제일 맛있게 만드는 나의 단골집이다.

아인슈페너는 홀짝 마시면 그 맛을 알 수 없다. 첫 모금에 꿀꺽꿀꺽 넘겨야 제맛이다. 부드러운 생크림과 쌉싸름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오전 내내 팽팽히 이어져있던 통증의 점들이 투두둑 끊기며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 기억의 편린들이 뭉뚱그려져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즉석 사진처럼 인화되었다. 정밀하지 못해 미화된 사진 한 컷으로 출력되었다.

나는 뿌옇게 변질된 내 마음의 사진을 단골 카페 어딘가에 붙여놓고 나왔다.

아인슈페너의 힘인지, 본성이 무디고 투박스러워 그런지 오늘 쓰레기통은 아인슈페너 한 잔으로 비웠다.  

4,500원짜리 아인슈페너 한잔을 사직서와 맞바꾸다니.  

나도 참,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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