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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민 Jul 13. 2019

어버이 칼국수


 스물아홉 살의 나는,

 여전히 주말마다 후루룩 맛깔난 소리와 입안 가득 찬 칼국수의 두터운 면발을 떠올린다.


 위 문장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들만 모아 오래도록 우려낸 뽀얗고 적당한 점성을 지닌 칼국수 한 그릇을 연상했을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뽀얀 국물의 구역에 따라 빨갛게 물든 칼국수를 연상한다. 혹시라도 내 짐작에 각자의 칼국수가 들통났다면 심심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학교는 방학이란 걸 했으나 학원은 쉬는 날 따위 없었다. 벌써부터 겨울 방학 전에 있을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만 해도 내 또래 사이에서는 명문학원이라는 것이 유행했었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학원에 가면 학교 친구의 80%는 만날 수 있었다. 월 수 금 또는 화 목 금으로 수업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평일엔 등교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주말은 언제나처럼 짧게 머물다 가는 것이 기다렸다가 챙겨보는 TV 만화 같았다.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점심시간 때문이었다. 은근히 친구들과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아내와 아들과 쉬는 아버지와 눈웃음치며 드라이브 가자고 제안하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외동이었지만 활기차고 따듯한 주말을 갖게 됐다.

 특히 주말 점심시간만큼은 정말 따듯했다. 주로 토요일 점심 메뉴로는 엄마표 칼국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놀고 있으면, 서서히 집안에 온기와 함께 멸치육수 냄새가 피어올랐다. 지금이라도 솔직한 내 심경을 말하자면, 그 순간부터는 나와 놀아주셨던 아버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지 않으시길 바라며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평소에는 한참을 밥 먹으라 불러도 좀처럼 식탁에 자리하지 않는 아들인데, 토요일 점심시간의 칼국수 앞에서는 달랐다. 일찌감치 식탁에 앉아 애꿎은 젓가락만 쪽쪽 빨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더 이상 소파에 있지 못하고 부엌으로 와서는 냉장고 속 이날만을 위해 맛있게 숙성되고 있는 김치를 꺼내 준비하셨다.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완벽하게 조화로운 시간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김치만 꺼냈던 게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고추장을 꺼냈다. 고추장, 바로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칼국수를 탄생시킨 어마어마한 재료다.


 아버지는 칼국수가 식탁에 놓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으로 고추장을 살짝 퍼내고는 한 입 드실 만큼의 부위에 고추장을 풀어 드셨다. 이렇게 하면 매콤하고 달달하게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뽀얗고 깔끔한 전체적인 맛 역시 방해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량의 고추장을 묻힌 젓가락을 당장 먹을 부분의 면발과 국물에 솔솔 풀어서 후루룩 먹는 방법이다. 아버지가 고추장을 풀기 위해 면발을 살살 흔드는 소리가 꽤나 찰지게 들렸다. 나도 그 맛이 너무 궁금해서 망설임 없이 따라 했고, 맛과 재미에 반해버린 나는 그 이후로 나는 칼국수 하면 기본적으로 우리 집만의 어버이 칼국수를 떠올린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만들어 줬기에 ‘어버이 칼국수’라 부른다.



 어버이가 탄생시킨 칼국수 때문에 나는 중학교 2 학년 여름방학부터 결혼 전까지도 주말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토요일 오후 한 시다. 지금은 주말에 함께 하지 못해 더욱 그리운 우리 가족만의 음식이다. 이제는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 갈 차례다.


 ‘왜 아버지는 그날 고추장을 꺼내셨던 걸까?’

 ‘평생 한 번도 그렇게 드신 적 없었던 분께서 어찌 그리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하셨을까?’

 지금에서야 여러 궁금증이 생겼다. 곧장 아버지께 전화로 여쭤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대답을 해주셨다. 기본 맛도 맛있고 살짝 맵고 달아도 맛있겠다 싶으셨단다. 그래서 두 가지 맛이 다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의 짬짜면과 같은 원리였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니, 나는 더더욱 어버이 칼국수를 잊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또다시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그날을 상상하며 아내에게 칼국수를 부탁했는데, 벌써부터 주위에 온기가 차고 진한 멸치육수 냄새가 난다. 나는 조용히 냉장고를 열어 김치와 고추장을 꺼내본다. 맛있는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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