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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환생.

6화. 토끼와 거북이.

장미가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정문을 통과해 걸어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던 경비업체 직원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환하게 웃으며 답례를 한 그녀는 사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잠시 휘청였다.  어제 과하게 마신 숙취가 올라와 머리가 띵해진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서 손으로 이마를 짚으려다가 자신의 손가락에 감긴 밴드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살폈다.  어디서부터 필름이 끊긴 건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심하게 잔소리를 해대는 혈육의 상태로 유추해 보건대 사고를 단단히 친 건 분명해 보였다.  당장 핸드폰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지만 어찌 됐든 출근은 해서 죽더라도 사무실에서 죽자는 각오로 그녀는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녀의 사무실은 국립중앙박물관 내의 전시관과 분리된 별관에 위치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

그녀는 별관 중앙에 위치한 탕비실에서 커피 한잔을 내려서 손에 든 채 자리로 돌아왔다.  사무실 전화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려다가 아직은 이른 시간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고 바탕화면에

저장된 PPT파일을 열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그녀가 다음 분기에 전시를 준비 중인 민속화의 목록들이 카테고리별로 분류되어 표시되었다.  항목 중 한 개를 더블클릭하자 화면에 다시 전시 예정인 민속화 중 토끼와

거북이가 화면 가득 보였다.  


'아~저 토끼.  왠지 낯익네.  전시회 준비 때문에 너무 자주 봐서 그런가.'




메뚜기의 삶을 마치고 환생사진관에 돌아온 그녀에게 사진관 주인인 동방삭은 익숙한 동작으로 그녀를 카메라 앞의 의자로 안내했다.  팟 하는 플래시 불빛과 함께 찰칵하고 사진이 찍힌 뒤 현상실에 들어가 토끼가 찍힌 액자 위에 메뚜기를 얹은 동방삭은 중앙홀의 단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사면에 위치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네 가지 빛이 중앙에 모인 순간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미 토끼의 품 안에서 젖을 찾는 아기토끼로 다시 태어났다.   곤충의 삶도 짧았지만 토끼의 삶도 인간의 기억을 지닌 그녀에게는 너무나 짧아서 젖을 빤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속에는 강한 떡니가 돋아났다.  토끼의 본능대로 뭔가를 쏠아대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녀의 눈에 큰 바위에 기대어 웅크린 거북이 한 마리가 보였다.  보통 토끼였다면 거북이에게 다가가지 않았겠지만 인간이었던 그녀는 거북이가 신기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거북이 곁에 다가가게 되었다.  


"이보슈.  거북이 양반.  왜 여기 있는 거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거북이는 몸통에 절반은 파묻었던 고개를 빼내어 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내가 토끼라면 이가 갈리오.  물론 당신이 그 토끼는 아니겠지만 말이오."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그러시오."


-"난 동해 용왕님의 신하인 별주부라고 하오.  용왕님이 큰 병에 걸리셨는데 토끼 간이 약이 된다 하여

  내가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갔다가 간계에 속아 용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소."


"용궁에서 어느 누가 토끼 간이 약이 된다 했소?

 일단 용왕님 증상이 어떠하시오?"


이미 희망을 잃은 별주부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맘에 토끼에게 용왕님의 병증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인간 시절 의서도 제법 읽었던 토끼가 된 꽃님이는 증상을 듣고 대번에 용왕님의 병이 허혈증임을 알 수 있었다.


"이보오.. 별주부 양반.  그건 토끼 간이 약이 아니라 약이 따로 있다오.

  마침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약이 있는 곳을 아니 그걸 가지고 용궁으로 돌아가시구려."


숲 속으로 깡충깡충 뛰어간 토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자삼 세 뿌리와 송로버섯 한 송이에 패랭이 꽃 한 다발을 가져다 별주부에게 건네주었다.  토끼에게 속았던 전력이 있던 별주부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토끼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용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토끼가 챙겨준 약재를 등껍데기에 갈무리한 채 용궁으로 돌아갔다.  


인간시절 행랑채의 해결사였던 꽃님이의 처방은 용왕님께도 통했다.  병이 완치된 용왕님은 별주부에게 큰 상을 내렸고 별주부는 토끼를 만났던 북쪽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다.  

하지만 용왕님은 건강을 되찾자마자 병을 이유로 오 백 년간 미뤄뒀던 포세이돈과의 대결을 감행했고

지중해에서 치러진 그들의 맞대결로 인해 온 바다가 일주일 내내 검게 어두워진 뒤로 사람들은 두 신이 맞붙었던 바다를 흑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두 신은 일주일의 대결 끝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고 별주부는 약을 구해 용왕님을 치료한 자신을 죽는 날까지 자책했다고 전해진다.  




-"팀장님 , 일찍 나오셨네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연구원의 목소리에 한 손에 커피잔을 든 채 모니터 화면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몰두해 있던 장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 화영 씨 어서 와."


아무래도 술이 덜 깬 탓이라며 모니터의 민속화로 겹쳐 보이던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운 장미는 당장 마무리해야 할 보고서 리스트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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