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학교는 적막이 감돌았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학교 운동장을 창문 너머로 흘깃 바라본 박 선생은 한숨을 내쉰 뒤 손에 들고 있던 학생 기록부로 시선을 돌렸다.
민주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는 학생 기록부를 한참 동안 살피던 박 선생은 책상 위에 학생기록부 철을 올려
놓은 뒤 눈을 감았다 떴다. 동료 교사들도 퇴근을 한 교무실은 텅 빈 운동장만큼이나 고요했다.
잠시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박 선생은 지갑에 끼워져 있던 메모지 하나를 꺼내어 들고는 핸드폰에 메모지에 적힌 숫자를 눌렀다.
신호가 두어 번쯤 울렸을 때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말씀하시죠."
전화를 받은 상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어조로 입을 열었고 막상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박 선생은 순간 사레가 들려 한참 기침을 하고서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땅한 학생이 한 명 있긴 합니다만........"
대한민국의 권력은 정치인들이 그리고 부(富)는 재벌들이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위에 검찰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뿐만 아니라 없던 죄도 검찰이 기소를 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세상이었다. 그 권력의 가장 끝 꼭짓점에 대검찰청 검찰청장인 나지왕이 있었다. 일본 총독부 소속 고등법원에서 법관을 지낸 조부부터 삼대에 이른 자신까지 삼대가 모두 법관출신이었고 나이 오십 인
지천명(知天命)에 검찰청장에 역임된 그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부침 없이 달려온 그의 화려한 승승장구의
나날 속에서도 한 줌 근심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자식이었다.
자신의 큰아들인 지한은 자신이 걸어왔던 과정을 그대로 답습시켰다. 유명한 선생을 붙여서 선행을 했고
유창한 회화를 위해 중학교는 싱가포르에 있는 사립 영국인 학교를 보낸 뒤 국내로 들어와 외국인 고등학교를 보냈지만 고등학교를 들어간 뒤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성적이 끝도 없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두면 사법고시는 고사하고 국내 대학 진학도 어려운 상황으로 판단되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입학기여금으로 입학이 가능한 미국 대학에 겨우 집어넣었지만 결국은 약물 중독으로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보스턴 근교의 요양시설에 강제 입원된 상태였다.
대검찰청 꼭대기 층에 위치한 검찰청장실 가죽의자에 앉아 있던 나지왕은 의자를 돌려 어둠이 짙게 내린
창문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자신이 뜻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쥔 모래처럼 흘러내리고만 큰아들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진 그가 말아진 주먹에 힘을 주고 생각을 짓씹고 있을 때 사무실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파일철을 들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김비서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그에게 정중하게 목례를 한 뒤 그의 곁으로 다가와 책상 위에 파일철을 올려놓았다.
검찰청장에게 소속된 부하 직원들은 많았지만 조부 시절부터 그의 집대소사를 처리해 온 김 씨 집안의 삼대 손은 지금도 나氏 집안의 일을 도맡고 있었다. 나氏 집안은 대대로 자신들의 치부를 해결하는데 김氏의 손을 빌어왔다. 지금도 나지왕은 현재 자신이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김비서에게 맡겼고 그는
자신의 주인의 요구에 즉각 답을 만들어왔다.
잠시 시선을 들어 김비서를 일별 한 나지왕은 책상 위에 놓인 파일철을 펼 처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파일을 넘기던 나지왕은 세 번째 장에서 넘기기를 멈춘 채 고개를 들어 김비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길에 김비서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남자애들을 원하시는 거.
하지만 군대라는 리스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한 명쯤은 대안이 필요하단 판단이었습니다."
김비서의 대답이 자신의 의혹을 해소해주기라도 하듯 나지왕의 이마에 잡혔던 세줄의 주름이 다시 펴졌다.
"아무렴, 자넬 믿지. 이번엔 어떠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지."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민주는 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치워둔 채 한쪽 구석에 있던 조그만 반상의 다리를 한 개씩 펴기 시작했다. 그녀가 반상 위에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루종일 제봉공장에서 일한 엄마의 온몸은 일이 끝난 뒤 털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짧고 긴 실 자락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민주는 엄마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반찬통 세 개를 꺼내서 반상 위에 올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욕실에 들려 간단하게 씻고 나온 엄마와 나란히 침묵 속에서 저녁을 먹은
민주는 상을 치운 뒤 TV를 보는 엄마에게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런 그녀를 고개를 돌려 쳐다본
엄마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민주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할 말 있니?"
엄마 앞에 말없이 봉투를 들이민 민주가 말했다.
"엄마. 나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딸의 말에 놀란 엄마는 딸의 얼굴을 다급히 살폈다. 딸의 시선은 천정 모서리의 시커멓게 뚫린 곳에 닿아있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그곳을 확인한 엄마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손으로 힘주어 움켜쥔 종이처럼 와락 구겨진 엄마의 표정은 그 순간 부서져버린 마음처럼 참담했다. 아무 말 없이 가슴을 손으로 짓누른 엄마의 모습에 애써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민주가 입을 열었다.
"난 이 집에서 죽은 고양이처럼 저렇게 죽어 쇠파리로 살고 싶지는 않아. 날 보내줘.
이 서류만 해주면 원장님이 나 대학까지 보내준댔어."
딸의 말에 엄마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서류를 꺼내 눈앞에 들어 올려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