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잡을까?"
같은 동네 사는 사람과의 연애를 꿈꿨다. 늦은 밤이나 주말 아침이라도 슬리퍼를 신고 츄리닝 차림으로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하는 그런 일상을. 자주 만나는 걸 선호해서 야근을 해도 부담 없이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헤어질 수 있는 그런 편안한 만남을 원했다. 합정동에 십 년을 살면서도 그 로망은 거의(?!) 실현 못 한터라 수그러들 법도 한데 망원동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동네가 바뀐 만큼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새 마음 새 뜻으로 로망 실현을 다시 꿈꿨다. 망원동엔 비교적 싱글들이 많지 않을까. 아니, 합정보다도 많을 것 같은데!
새로운 집에서 산뜻해지는 마음때문인지 기대감은 증폭됐다. 하지만 현실은 늘 현실이듯 새롭게 사람을 만날 기회는 딱히 없었다. 극 I(내향성)의 기본 성향에 간헐적 E(외향성)가 혼재하지만 새로운 모임을 찾아가기에도 애매했고, 딱히 관심 있는 운동이나 관심 분야도 없었으며 (나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모임도 나가보고 한 건 오래전에 다 뗐다 하하) 도움도 안 주는 이놈의 회사는 늘 일이 넘쳐 보통 야근 아니면 새벽 출근을 해 여유가 있을 땐 집에서 쉬기 바빴다. 주말엔 아는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편안하게 보내며 근심도 좀 풀고, 그러다 다시 월요일부턴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고. 남들처럼 바(Bar)를 혼자 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무슨 모임에 굳이 가는 것도 뭔가 부자연스럽고. 그렇게 로망은 로망인 채로 지내는 와중에 뜬금없이 충남 서산에 사는 총각을 소개받았다.
무수한 소개팅 경험으로 얻은 능력이 있다면 첫 만남에서 기고 아니고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 또 만나기 전에 주고받는 카톡으로 대략 이 사람의 됨됨이나 (내가 느끼는) 매력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는 것.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안지 오래된 어린 친구가 우리 두 사람이 뭔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느닷없이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다. 뭐, 어차피 아무 것도 없으니 생각 없이 하겠다고는 했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오면서 괜스레 귀찮아졌다. 일단 카톡으로 얘기를 하다 보니 너무 착해보였다. 연락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뜬금없이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주말에 친구들과 서해를 놀러 가 맛있는 걸 먹는데 혼자 먹기 미안하다며 배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쿠폰을 주는 게 아닌가. 아니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걸 주는 남자는 진짜 안쓰럽게 착하거나 나쁜 남자이거나. 그런데 아무래도 전자 같아 보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보다 한 살이 적었다! 항상 연상만 만났고, 어린 사람은 남자로 안 보이는 선입견 때문에 연하는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성의 있게 보내던 카톡도 조금씩 대충 보내고 있었다. 아.. 약속은 했고, 모르는 사람 소개도 아닌지라 치례만 하고 오자 싶었다.
소개팅 첫 만남을 주말 늦은 저녁, 이자카야에서 하자고 한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집에서 멀리 가는 것도 싫었지만 상대가 멀리서 오니 강남역 정도는 감수했다. 보통 카페나 파스타 가게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얼굴도 안 본 사이에 첫 대면부터 무슨 술인가. 진짜 술을 좋아하나 보네, 아 별로다. 만남 거의 직전엔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내 스타일도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일부러 못 나온 사진만 보낸 게 아닌지 의심이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처음 만났는데 생각보다 정말 착했고 (이 의미는 여자어(語)로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예의도 있어 보였다. 괜찮은 청년인듯했다. 상대도 같은 마음이라면 좀 더 알아봐도 괜찮을 듯싶었다. 소개팅남의 술수가 잘 먹힌 건지 소주 반병도 안 되는 내 주량을 가볍게 무시하고 분위기를 타 주량의 두 배 이상은 마셨다. 사실 그날 오후에 만난 친구에게 소개팅남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술집에서 술을 한 잔도 안마실 예정이라며 엄포하고 나온 터였다. 결심이 무색하게 살짝 취한 것도 모자라 아쉬운 마음은 서로 통했는지 2차로 맥줏집을 가기로 합의했다.
샘플러를 파는 수제 맥줏집에서 나는 손에 꼽는 역대급 과음을 했고, 다음 날 일요일 오후엔 소개팅남과 카톡을 주고받는 와중에 무슨 일인지 그냥 곯아떨어져 버렸다. 의식 없이 무작정 뻗어버린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망원동에서 몇 번 더 만났다. 두 번째 만남엔 서대문구의 안산에서 등산을 하고 망원한강공원을 둘러보다 용머리 마트 사거리에 있는 숯불닭갈비 맛집 계륵장군에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세 번째 만남은 몇 주 후였다. 중간에 추석 연휴를 끼고 연락을 무지 자주 했던 터라 이제 만나면 사귀자 하겠지 엄청난 기대를 안고 나갔다. 홍대에서 만나 무신사 테라스에 갔는데 커피를 한잔하고 합정역으로 걸어올 때까지 도통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다. 음, 사귀자는 말은 좀 걸릴 수도 있지. 아니 근데 손도 안 잡네. 그러면 내가 용기를 좀 줘야지 싶어 합정역으로 향하는 대로변을 옆으로 두고 걸을 동안 그가 있는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 걸었다. 반응이 없길래 어깨를 들이밀 정도로 밀착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밀치나 하는 듯 좀 더 간격을 유지하려고 저만치 더 떨어지려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손을 잡지도 않고, 헤어질 시간이 다 됐는데 아무런 말도 없어서 이 사람은 마음이 별로 없구나 싶어 상심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헤어지기 전 망원역 2번 출구에서 가까운 왕초떡볶이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떡볶이를 먹는 와중에도 나는 이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맛도 못 느끼며 그저 주입만 하고 있었다. 다 먹어갈 때쯤이었나, 그는 다음에 떡볶이 맛집을 나와 같이 또 가고 싶다고 했다. 오잉, 나에게 관심이 없지 않구나, 나랑 또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그럼 이건 확신해도 좋을 그린라이트가 아닌가! 연애의 시작엔 늘 수동적인 나였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넘쳐버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떡볶이집을 나와서 나는 용기를 갖고 생애 최초로 이성에게 먼저 이렇게 말해버렸다.
"우리 손잡을까?"
사람 많은 망원동 시장 골목에 서서 그는 자기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봇물 터진 듯 얘기를 시작했고, 우리는 연인이 되어 주말이면 망원동의 이곳저곳을 함께 다녔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보물섬 김밥과 망원동 즉석우동, 나무 베이커리와 부산어묵, 너랑나랑 호프, 그리고 망원한강공원을 함께 공유했고, 망원동 유수지의 피자빌스와 동교동의 탐스피자, 하늘공원에 같이 첫 발 도장을 찍었다. 그는 이런 별천지 같은 동네는 살면서 처음 본 것 같다며 감탄했다. 집 주변에 이렇게 많은 맛집과 시장이 있어 발길 닿는 곳마다 즐거운 동네가 신기하고도 매력적이라며.
망원동을 사랑하게 된 그는 이제 남편이 되었고, 내가 망원동을 떠나기 전까지 일 년 반 이상을 함께한 덕분에 망원동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그저 망원동만으로도 좋기만 했던 날들이 그와 함께 하며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어 더 행복한 기억이 됐다. 남편이 아니면 안 되었고, 망원동이 아니면 안 되었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때가 있기에 망원동이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