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에서 반복돼 나오는 일본 홋카이도 특유의 한탄조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처럼은 하지 않더라도 2021년 1월엔 눈을 그것도 함박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눈이 그친 날, 바람이 만든 눈 회오리도 볼 수 있었다. 이번 겨울의 눈은 건조해진 눈[眼] 속을 적셔주는 인공눈물처럼, 팬더믹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팍팍한 마음 밭 습도를 필요충분하도록 높여주었다.
1월 중순 어느 날, 외출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의 밤 산책로는 부산스러웠다. 눈이 산보객들의 마음을 들썩거리게 했기 때문이다. 꼬마 오리 눈사람은 처음 본다. 근처 중랑천의 오리 가족들처럼 모여 있었다. 한 학생이 열심히 기구를 이용해 오리를 ‘찍어대고’ 있었다. 우둔하게도 나는 사진 찍어도 될까요? 했다. 학생은 속으로 ‘그러면 감사하죠.’ 했을 텐데 말이다. 그 학생에게서 즐거움의 눈발이 튕겨 나오는 것 같았다. 눈사람은 이곳저곳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빌라 계단을 오르다 창밖으로 맞은편 빌라의 눈 덮인 옥상 텃밭을 보았다. 이곳 주인장 할머니는 요즘도 가끔 모습을 나타내 무언가를 하신다. 봄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할머니는 눈이 옥상을 다시 덮을 때까지 텃밭 가꾸는 즐거움을 잔뜩 누리실 것이다.
이런 겨울에 일본어 번역가 지인이 유튜브 코너를 개설한다고 연락이 왔다. 동료의 권유로 잘 보지도 않던 유튜브 세계에 들어가 급작스레 유튜버가 될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일로서가 아니라 뭔가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두 주 지나더니, 매주 일본 특유의 정형시인 와카 한 편씩을 소개하고 내용도 풀이하는 내용의 유튜브 방송 개설 소식을 전해왔다. 나도 생전 처음 유튜브 구독자가 되었다. 그 지인이 하는 말. “개인적으로 유튜버 활동이 재미있고 시간도 잘 갑니다.”
번역하고 싶은 프랑스 원서를 살펴보는데, 내용 중에 ‘이키가 이’라는 일본어 단어가 튀어나왔다. 처음 접한다. ‘사는 보람’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세상을 이롭게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환경 보호, 동물 보호, 남녀평등 등 어떤 분야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동기를 자문하게 한다. 그런데 이 동기에 ‘이키가이’를 접목시켰다. 아침에 기꺼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 호기심이 맴돌게 하는 것 그러니까 사는 보람이 되는 것도 자문하게 한 것이다.
‘이키가이’에 관한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하니 『이키가이 : 일본인들의 이기는 삶의 철학』이 나왔다. 이 책 소개글 중 인상 깊었던 내용은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 작은 일들에서 보람을 찾고 행복한 생을 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였다. 저자는 따스한 햇살 바라보기, 커피 한 잔 하기, 재료비도 건질 가망이 없는 그림을 몇 시간 공들여 그리기가 ‘이키가이’라고 했다.
위 프랑스 원서엔 모든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고루 갖춘 ‘다이버전트’가 되기를 권하고 있다. 이 내용 때문에 나는 <다이버전트> 영화 시리즈 세 편을 다운로드하여 보았다. 안 해도 되는 짓인데 호기심이 발동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몇 년 후의 내 호기심은 충족시켜 주었다.
‘이키가이’는 언뜻 ‘소확행’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이키가이’, ‘소확행’을 떠올려보았다. 소소한 것들이다. 안경 벗고 꽃 들여다보기, 나에게 다가온 곤충을 신기하게 쳐다보기, 구름과 달을 비롯해 겨울 별자리 ‘오리온’ 올려다보기, 로마, 뉴욕, 런던 풍경이 그려진 티슈 곽 모아놓기 그리고 번역하고 싶은 책 발굴하기 등이 그런 것이다.
어제 하늘 풍경을 보고 이렇게 메모했다. “1년 중 지구 북반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겨울 동안에 태양은 저공비행을 한다. 멀어서 열기는 덜하지만 남향 창 내 방의 태양 빛은 직사광선과 같아서 낮엔 줄곧 햇볕 가림막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 태양이 석양을 만들며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시간, 하늘 한복판에 초승을 막 지난달이 일찌감치 맑은 하늘에 도드라지게 떠 있다. 이틀 전 폭설의 하늘이 아니다. 분필로 잔뜩 써 댄 칠판을 지우개로 지운 하늘이다.”
여행할 수 있었을 땐 숨어 있거나 은근한 매력을 주는 풍경을 사진에 담기, 사람이 드문 곳을 걸어서 돌아다니기, 그러다 생각난 글 소재 메모하기, 돌아와 글쓰기가 그랬다.
또 요즘엔 영화 다운로드하여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고 있다. 그중 일본 멜로 영화도 여러 편 보았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눈의 꽃>,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깨끗하고 연약한>, <우리들의 완벽한 세계> 등을 보았다. 대부분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라 겸연쩍긴 했지만 잘 보았다. <9월의 사랑과 만날 때까지>의 여주인공은 디카를 들고 다니며 살가운 풍경을 찍곤 한다. 사진 찍는 이유를 여주인공은 “사진을 찍고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그 한순간 그 풍경이 저 혼자만의 것이 되는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이키가이’다.
조금 길게 본다면 즐거움으로 시작한 일이 본업이 돼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다시 일본 영화 이야기다. <심야식당2>의 주인공 마스터는 무슨 음식이든 주문이 들어오면 가능한 한 만들지만 메뉴판에는 술 이외에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딱 하나만 적어 놓았다. 마스터가 그렇게 한 이유는 “처음으로 남이 맛있다고 칭찬해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행복한 사전>의 여주인공은 여자 일식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민한다. 그때 남자 주인공은 (그대의) 요리가 제일 좋다고 격려해준다. 둘은 결혼하고 후일 여자 주인공은 ‘달의 뒤편‘이라는 멋진 이름의 일식집을 차린다.
일본어 단어를 소재로 삼다가 일본 배경의 소재들이 잔뜩 이어졌다. 궁합이 맞았다고 자평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물어봐도 될까? 그대의 ‘이키가이’는 무엇인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