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마음을 울리는 시 하나를 발견했다. 목포 시내 어느 골목에서다. 뒤에서 소개하겠다.
목포 나주곰탕을 이틀 연거푸 아침으로 먹었다. 일요일엔 3대째 운영한다는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한우가 들어간 맑은 국물의 해장 국밥. 진했다. 탕이든 국밥이든 다대기와 후추를 듬뿍 넣어 먹는 편인데 이 음식엔 그렇게 안 하기로 했다. 대신 된장 찍은 작은 풋고추로 매운맛을 보탰다. 다음날 들른 다른 대형 곰탕집은 한우가 아닌 듯 의심스러웠다.
월요일은 여행객에겐 곤혹스러운 요일이다. 웬만한 곳은 다 문을 닫으니까. 그러나 사람 사는 동네는 상관없다. 바다가 보이는 얕은 산동네 서산동 시화골목도 그렇다.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벽화마을은 많지만, 시화마을이나 시화골목은 처음 본다. 골목 벽에 시와 그림이 같이 있는 동네인 것이다. 그림은 지역 화가들이 그렸지만 시는 상당 부분 이곳 마을 사람들이 썼다. 전라도 사투리 가득한 시.
한산도의 추억
영화 <1987>로 유명해진 ‘연희네 슈퍼’ 앞. 영화세트 그대로 보존돼 서산동 시화골목의 1호 관광지인 곳. 적은 수의 여행객들이 슈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좁은 내부를 둘러본 다음 자리를 비껴준다. 앉은뱅이저울, 꾀돌이 과자, 두 개 연탄을 움켜쥐고 있는 쌍 연탄집게가 눈에 띈다.
1987년 그때쯤엔 노상에서 버스 토큰, 신문, 담배를 파는 간이 판매대가 많았는데 담배를 한 개비씩 팔기도 했다. 그때 나도 몇 대 사서 피워본 ‘한산도’를 비롯해 오랜 수명을 유지한 담배들 또한 비치돼 있었다.
그때 시절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받은 전단지를 내 가방에서 찾아낸 전경에게 붙잡혀 버스 안으로 끌려들어 가 집단구타 당한 경험. 딱 한 번 광화문 네거리로 시위하러 나왔다가 최루탄에 혼쭐이 났던 경험.
산동네 골목 이곳저곳을 천천히 누볐다. 알록달록 지붕, 화분들로 입구를 가득 메우고 지붕에 접시 안테나 단 집, 돌담 바닷속에서 톡 튀는 색깔로 유영하는 홍어, 가슴 저린 사연 담고 바다 위를 떠도는 유리병 편지.
작은 집, 작은 미술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고양이급식소’(개집 크기)를 보고 놀랐다. 담당 관리자들이 중성화 수술도 겸하면서 ‘길고양이와의 공생’을 꾀하고 있었다.
또 놀랐는데 고양이들을 ‘임보’(임시보호)하는 집도 있었다. 커튼이 쳐진 현관문엔 조용히 지나가라고 타이르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안은 살짝만 들여다보고 소리 날까 우려돼 조금 떨어져서 사진을 찍었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이꽃 미술관’. 닫혀 있는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공간. 스위치를 켜고서 들어간, 작은 단칸방 집을 개조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술관’. 스위치 아래 함민복 시인의 시 문구가 사랑스럽다.
시화 소품이라고 할, 시가 적히고 그림이 그려진 다양한 종류의 캔버스들이 곳곳에 비치돼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기 직전의 벽에도, 연탄보일러 물통에도. 시와 그림들이 도심 보도블록 사이로 힘겹게 자라 오른 식물들처럼 이 작은 집에서 오밀조밀 살고 있었다.
배와 집
서산동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연희네 슈퍼’ 맞은편에 있는 ‘서산동갤러리’다. 서산동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예술가들의 작품을 액자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작가별로 책갈피를 제작해 판매도 하고 있었다. 유심히 들러보았다.
그러다 한 액자에서 전경삼 시인의 시 ‘조금, 서산동’을 발견했다. 항구가 인접한 서산동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였다. 이 시는 책갈피로 제작돼 있지 않아 너무 아쉬웠다. 브런치로 소개할 때 시인의 이름을 명기할 것을 당부하는 갤러리 지킴이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여기서 ‘조금(潮금)’은 조수(바닷물)가 가장 낮은 때를 말한다.
밤마다 골목길 거슬러 올라 비탈진 언덕 어디 정박한 배들
서로 기댄 채 잠들고, 아침이면 그 배들 골목 따라 바다로
되돌아갔으리.……누군들 붙잡고 싶은 사람이나 순간이 없었을까.
……조금 때 정 주고 바다로 돌아간 사람도 그러했으리.
다음 조금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던 사람도
또한 그러했으리.
- 전경삼 시인의 시 ‘조금, 서산동’ 중에서
내가 목포를 찾은 때가 조금 때(음력 7, 8일) 무렵이었다. 조금 때 목포에 와 정 주고 왔다. 조금 때, 나는 조금 느리게 여행을 했다.
배와 집을 기막히게 동일시한 이 시 전문을 알고 싶다면 ‘서산동갤러리’를 방문해 보기를. 시인의 책갈피 세트 하나쯤 구입하고서 갤러리 지킴이 허락받고 담아 오기를.……내게도 약간은 얄미운 구석이 있다.
느리게 느리게
2박3일의 여정을 끝내고 서울 올라올 때는 ITX 새마을호를 탔다. 창가 밖 드넓은 평야를 보면서 깨달았다. 목포를 오고가고 할 거라면 새마을호가 여러모로 훨씬 낫다는 것을.
목포행 ITX 새마을호(또는 ITX 마음) 열차는 KTX 고속철도 구간이 아닌 예전 호남선 철도 구간을 지나간다. 덕분에 터널 구간이 훨씬 적다. 탁 트인 충청 전라 대지를 더 넓은 창으로 오래오래 내다볼 수 있다. KTX 열차보다 좌석도 넓어 나로서는 모든 열차 중에서 승차감이 제일 좋았다.
그렇게 새마을호를 타고 조금 느리게 서울로 향했다. 목포에서 들른 곳은 더 있었으나 4편의 여행기로 마무리하겠다. 목포 여행기는 조금 느리게, 대상을 한정한 다음 집중해 썼다. 사진을 찍을 때 풍경을 덜어내고 찍으면 더 나은 사진을 얻을 수 있듯 이번 여행기는 그렇게 했다. 4회를 쓰는 동안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은 아바(ABBA)의 명곡 ‘안단테 안단테’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