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수분 섭취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신체의 약 70%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날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의 신체는 약 70%는 물이 아닌 커피로 이루어져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영 엉뚱하다고만 치부하기에는 2020년 기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간 커피 소비량 조사 결과가 논리를 뒷받침해 준다. 우리나라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367잔으로 세계 2위, 전체 평균치(161잔)의 2배를 가뿐히 넘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농담처럼 모 회사의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나오면 파란 피가 흐른다 하지만, 이만하면 우리나라 직장인은 검은 피가 흐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엉뚱한 상상은 이만 접어두고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우리는 커피를 많이 마신다. 그것도 정말 많이!
나는 아주 늦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예 입에 댄 적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정말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카페에 갈 일이 있으면 스무디나 차 종류를 마셨고 씁쓸하고 맛없는 커피를 왜 마시냐는 주의였다. 그뿐 아니라 카페인에 대한 반응이 지나치게 예민한 것도 한몫했다. 몇 없는 연례행사로 커피를 마시게 되면 귀에 들릴 정도로 심장박동이 빠르고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또한 아이디어와 의욕이 유난스럽게 솟구치고 감정이 격양됐다. 집에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아이디어를 펼치며 실천 계획을 세우다 보면 순식간에 생각과 감정이 산화되어 버려 무기력해지고 공허함을 느꼈다. 맥이 빠져 누우면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답답하고 찜찜한 상태가 되고는 했다. 커피가 원인인지도 모르던 그때는 그저 젊은 날의 변덕이겠거니 했을 정도로 커피를 마시는 건 내게 특별한 일이었다.
그러다 스물여덟쯤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회사 생활은 야근과 출근 직후 회의가 무심한 듯 당연하게 연속되는 나날이었다. 늦게까지 야근하고 다음 날 아침에 회의하려니 집중도 어려운 데가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보려 애꿎은 허벅지를 꼬집어댔다. 틈나는 대로 화장실에 가 좌변기 칸을 걸어 잠그고 10분씩 쪽잠을 자기도 했다. 휴게실에서 자는 게 왜 그렇게 눈치가 보였던지. 마치 스스로가 무능하고 불성실해 보일 것 같다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 이런 생활이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지니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뭐라도 해봐야겠다 싶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회의 시간에 졸지 않았다. 되려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커피의 위엄을 실감했다. 아니 커피에 굴복했다. 마치 옛 이야기 속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와 마주한 것처럼, 나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힘을 빌려주겠다는 계약을 맺고 말았다. 차력(借力)의 뜻이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함.'이라니 커피를 마시는 게 내겐 차력 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