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혜민 Mar 03. 2022

그 시절 그 공기

완벽하다는 것은, 적당하다는 것은

아버지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자주 공기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작은 플라스틱 조각 5개로 하는 그 공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웃나라 중국의 항구도시 상하이에서 태어나 주욱 살았던 나는 초등학생 때 공기가 없었다. 당시 나에게 공기란 몇몇 친구들이 공기를 학교에 가져올 때만 할 수 있는 진귀한 게임이었는데, 나는 공기를 정말 잘하고 싶었다. 공기를 잘해서 팀을 정할 때마다 한정판처럼 너도나도 찾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 아이들처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공기 두 개 중 필요한 공기알만 종이로 긁어내듯 빠르게 잡아내고 싶었고 손등에 얹어진 공기 5개를 사냥하는 독수리 마냥 빠르게 잡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가지고 연습할 공기가 없었다. 그런 내가 택한 것은 지우개였다. 엄지손가락만한, 두툼한 지우개 두 개. 한 손에 지우개 두 개를 담는다. 빠르게 하나를 위로 던지면서 하나를 내려놓고, 위로 던졌던 지우개를 다시 잡는다. 그 지우개를 다시 위로 던지고 바닥에 놓인 지우개를 잡고 공기 중에 떠있는 나머지 하나도 잡는다. 하교 후 저녁 먹을 때를 빼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이 단순하고도 지난한 동작을 화장실도 가지 않고 반복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공기 3배 정도 크기에, 질감도 다르고, 무게도 달랐지만 큰 지우개를 손으로 가득 잡는 데에 익숙해지면 작은 공기는 식은 죽 먹기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논리라 효율적인 연습 방식은 아니었으나, 효율적이지 않은 연습도 반복하다보면 효과적으로 되는가보다. 그렇게 연습한지 몇 주가 지나서 나는 정말 우리 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공기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종종 나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 시절의 나는 그만큼 좋아하는 것, 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잘해내려는 욕구가 강했다. 못하면 화가 났고, 잘할 때까지 만사를 제쳐두고 그 일에만 매달렸다.

아버지는 자주 나의 어린시절 공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태도로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공기 외에 활용하는 유사 소재도 여러 개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내가 중학생인 오빠와 탁구를 1:1로 붙을 때면 지는게 당연한데도 페어플레이를 고집했던 것, 그러면서도 지면 분해서 매번 눈물을 보였던 것. 부모님 결혼기념일 선물을 준비한답시고 학교, 등하교 버스, 집, 집 밖 가릴 것 없이  종이학 접기에 매달려 두 달만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었던 것. 고등학교 때 별명이 잠만보였던 내가 공부하겠다고 밤새 졸음을 쫓아주는 차가운 욕조 바닥에 앉아 교재를 읽던 것 등등. “걔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낼때면 나는 같은 답으로 대응 하고는 이야기를 돌린다.

왜냐하면 실제로 걔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그런 열정이 생겨도 시작 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큰 용기를 내어 시작하더라도 미적지근하게 하는둥 마는둥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못할까봐. 못하는게 들통나서 부끄러울까봐. 못하는 사람이 될 바에 안 하는 사람이 되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하고 싶은 욕구에 불도 지펴지지 않는다. 나의 열정과 욕심들은 어느새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같은 것이 되어있었다.

“그건 혜민님이 완벽주의자라서 그래요. 나도 똑같아요.”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게 어렵다고, 아무래도 의지가 부족한 것 같다고 고민을 토로하던 나에게 회사 이사님이 그랬다. 무슨 말이지? 시도 조차 안하고, 한다 해도 뭐 하나 제대로 끝내는게 없는 내가 어떻게 완벽주의자라는 말인가? 이사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완벽주의자일수록 완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시도를 못하고, 시도를 하더라도 완벽에 도달하지 못할거란 패배감에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이라고. 본인 또한 그러한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그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다보니 많은 것들이 쉬워졌다고. 아직도 그 말을 듣던 순간의 공간과 이사님 얼굴이 머릿 속에 맴도는 것을 보면 나에게 강렬한 대화였던 듯 하다. 이후 그 대화를 곱씹을수록, 실제로 나의 많은 감정들과 선택들을 설명해주는 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맞다.

돌이켜보면 공기쟁이가 되어 위풍당당하던 시절 이후에 나는 학습했을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공기 실력처럼 노력과 비례하게 결과가 나타나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세상 일은 지우개로 공기를 연습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직관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눈물 흘리고 분노 해봤자 결국 상처 받는 사람은 나라는 것을.

아버지가 또 다시 공기 이야기를 꺼낼 즈음 나도 어린 시절의 혜민이를 떠올린다. 그러게. 나도 좀 그립다. 혜민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