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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1. 2024

응원가 (삼진송)

쌓이고 쌓인 어느 날 

*응원가: 

야구 응원가에는 팀별, 선수별 응원가가 있다. 주로 공격 시에 응원을 하고 타자들마다 개인 응원가가 있다. 관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흥겹고 반복되는 멜로디를 사용하며 ‘안타, 홈런’등의 단어가 많이 들어간다. (투수는 응원가는 없지만 등장 곡은 있다)      



야구장에 가면 응원가와 응원 동작을 흥겹게 따라 하는 재미가 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응원단이 하는 대로 따라 했는데, 조금 지나니 어떤 상황에 어떤 응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첫 직관 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응원가가 있었는데 중간에 ‘유후, 유후’하는 추임새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직관 갔을 때 그 응원가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나오지 않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유후, 유후, 하는 응원가 있잖아. 그거 언제 나오는 거야? 나 오늘 그 노래하려고 기다렸는데 안 나왔어.”

남편에게 물으니 남편은 “그랬나?” 하고 만다. 난 그다음 직관에 가서야 그 응원가가 롯데 전준우 선수의 등장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수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나오는 응원가도 있다. 이기고 있을 때나 지다가 기세가 올라왔을 때는 ‘어기야 디어차~’하고 시작하는 뱃노래를 부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부산 갈매기’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공격일 때 주로 응원하지만 수비일 때 하는 응원도 있다. ‘빰빰빰빠라빠라빠바밤밤밤’하는 흥겨운 전주가 나오다가 ‘어느 날!’이라고 외친다. 그러고는 끝. ‘어느 날!’만 외치고 응원가가 끝나다니, 부르면서도 황당했던 응원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노래는 상대 타자를 삼진 아웃시켰을 때 나오는 삼진송이었다.      



‘어느 날’을 언제 부르는지 알게 되자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인물 동화 원고를 쓸 때였다. 초고를 써서 편집자에게 보냈는데 4~7세 대상 연령에 맞게 쉽게 수정해 달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기존 정보를 많이 덜어내다 보니 그제야 중복된 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24쪽으로 축약해야 하는 인물 동화에서 ‘그러던 어느 날’처럼 매력적인 첫마디가 어디 있을까. 매일 비슷한 일만 반복되던 일상에서 ‘어느 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      



조앤 롤링은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내고 거절 편지만 받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의 원고가 마음에 든다는 편지를 받는다. 마틴 루터 킹은 학교에서 책을 많이 읽고 말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웅변대회에 나가라는 제안을 받는다.      



나에게도 ‘그러던 어느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러던 어느 날’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무언가가 쌓이고 쌓이고 쌓인 어느 날,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우선은 쌓여야 한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선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라디오 방송에 매일 하나씩 내 사연을 보낸다. 아침 7시가 되면 라디오를 틀고 운동을 하거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DJ의 하이텐션 목소리를 들으면 늘어졌던 몸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는다. 운동을 하다가 요리를 하다가 ‘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좀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8000번을 눌러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내 사연이 방송되지 않으면, 에잉. 하고 다시 하던 일을 한다. 처음엔 조금 아쉬웠는데 이젠 뭐 일상이다. 문자를 보내기 위해 문장을 만들고 앞, 뒤 맥락을 생각하는 일은 하루 중 가장 먼저 하는 두뇌 활동이다.      



오늘은 홈트를 하는데 DJ가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주세요!’ 한다. 난 헛둘헛둘 스쿼트를 하며, 내가 좋아하는 문구를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유용한 문구는 바로 인덱스다. 인덱스나 책클립이 없으면 책을 못 읽을 정도다. 사연을 보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집에 있는 다양한 인덱스를 모아 사진을 찍고 ‘다 읽은 책을 중고로 팔아야 해서 책에 밑줄을 치지 않고 다양한 인덱스를 사용한다’는 간단한 사연을 보냈다. 그러곤 다시 헛둘헛둘 스쿼트를 했다.      



“자, 보내주신 사연 읽어보겠습니다.” 내 귀가 쫑긋 섰다. 5년간 한 종류의 볼펜으로 공부해서 임용에 합격했다는 사연, 편지 봉투를 꾸며주는 실링 왁스 도장에 관한 사연, 여러 사연이 나오다가... “10**님의 사연입니다.”라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10**님은 바로 나다. 하하하. 뭐든지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는 것.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이렇게 조그맣게라도 쌓아가자고 다짐한다. 별거 아니지만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간식 세트와 김치, 주유상품권, 편의점 상품권 등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기사로도 썼고 또 이렇게 에세이의 한 에피소드로도 쓴다.      



아이의 ‘어느 날’을 위해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나의 ‘어느 날’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이는 나를 보며 자란다. 생각해 보니 롯데 자이언츠의 삼진송인 ‘어느 날’이 아주 상황에 적절한 응원가 같다. 투수가 타자를 삼진 아웃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얼마나 많은 연습이 쌓였을까. 연습이 쌓이고 쌓인 ‘어느 날!’ 투수는 상대편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쌓이고 쌓인 어느 날!      



나의 어느 날은 과연 언제 오려나.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이 시간들이 어딘가에 잘 쌓여 있겠지? 그 어느 날이 너무 먼 것 같아 자꾸 야구를 보며 성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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