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대신 끊어주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기세나 힘 따위가 활발하지 않음.
운동 경기 따위에서,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길게 계속되는 일
*“스포츠 심리학자인 짐 테일러는 슬럼프를 ‘이전의 자기 수준에 비해 현저하게 수행 능력이 떨어지면서 이러한 상태가 평소 수행의 일반적 하락-상승 주기보다 길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 슬럼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특성만은 논쟁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첫째,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온다. 즉, 슬럼프는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스포츠 경쟁의 일부다. 둘째, 슬럼프는 언젠가는 지나간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선수들의 기량이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레전드는 슬럼프로 이루어진다> (p28, 29)”
아침 식사 준비를 할 때 보통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오전 7시에 하는 ‘굿모닝 FM 테이입니다’와 그 뒤 9시에 하는 ‘안녕하세요 정지영입니다’를 주로 듣는다. 일찍 나갈 때는 정지영 아나운서 방송까지는 못 듣는데 화요일에는 이동하면서도 듣는다. 화요일 9시 20분~30분쯤에 하는 ‘눈치 게임’을 좋아해서다.
게임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두 자리 숫자(10~99) 중 마음에 드는 숫자 하나와 마시고 싶은 음료를 문자로 적어 보내면 끝. 작가들은 노래 두 곡과 광고가 나갈 동안 청취자들이 보내온 숫자를 집계한다. 2부가 시작할 때 정지영 아나운서가 가장 적은 수의 청취자가 고른 숫자를 발표한다. 발표된 숫자를 보낸 청취자에게는 그 청취자가 고른 음료 기프티콘을 보내준다.
‘어떤 숫자를 고르지?’ 하고 생각하는 짧은 시간, 문자를 보내고 발표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짧은 설렘이 좋다. 내가 요즘 몇 주간 밀고 있는 숫자는 ‘27’이다.
‘27’은 최근 부진한 롯데에서 가장 부진한 선수의 등 번호다. 시즌이 바뀌고 신기할 정도로 못하고 있다. 아니, 몇 개월 쉬었다고 해서, 아니, 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더 잘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습을 했을 텐데 왜 못하는 걸까. 해설 위원의 말을 들어보면 타격 자세가 잘 못 됐다는데 더 나은 타격 자세로 바꾸려다 아예 예전 폼도 잊어버린 걸까.
특히나 이 선수는 높은 연봉으로 롯데와 FA 계약을 한 선수라 팬들의 실망이 대단하다. 돈이 아깝다, 다른 팀은 9명이 경기하는데 우리는 8명이 경기한다, 정도의 댓글은 귀여운 수준이다. 선수의 이름을 이상하게 바꿔 말하고 선수를 선발로 기용하는 감독까지 싸잡아서 같이 욕한다. 선발 라인업은 보통 1시간 전에 구단 인스타에 올라오는데 그 선수가 선발에 포함된 날은 그 아래에 댓글이 살벌하다.
‘설마 27번 선수가 댓글을 보는 건 아니겠지.’
사실 가장 잘하고 싶은 사람, 가장 속상한 사람, 가장 노력할 사람은 바로 부진한 그 선수일 것이다.
가끔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에 기사를 보낸다. 생활하면서 문제라고 느꼈던 점이나 깨달은 것들을 기사로 쓰는데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은 읽지 않는다. 예전에 한 번 ‘이런 글도 기사냐.’로 시작하는 악플을 보고 마음이 힘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디개 할 일 없는 사람인가 보네.’하고 훌훌 털어내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원래도 높지 않았던 자신감이 더 바닥으로 떨어지고 글도 잘 써지지 않았다.
‘내가 엄청난 글을 써서 악플러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어!’라는 마음보다는 ‘내 글이 그렇게 이상한가?’ 하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악플은 누구를 위한 글인가. 당사자가 읽고 상처받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더 나아지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 표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 대체 뭘 위해 그런 날카로운 말을 손을 움직여 쓰는 걸까. 27번 선수가 악플을 보지 않았기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27번의 플레이를 볼 땐 ‘으악!’ 소리를 지른다. 정말 불운하게도 득점 찬스가 있을 때마다 27번이 타석에 오른다. 잘하고 있는 타자도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 또 27번이다. 그러고는 이변 없이 땅볼. 왜, 왜 27번은 자꾸 땅볼을 치는가. 혼자 죽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죽는 병살타를 만드는가. 점수를 내지 못해 속이 상하고, 27번이 안타까워 속이 상한다.
그런 와중 내 나름대로 27번의 반등을 기대하며 하는 행동이 바로 ‘안녕하세요, 정지영입니다.’의 ‘눈치 게임’에 숫자 27을 적어 보내는 것이다. 어느 날 기적적으로 27이 당첨된다면, 부진한 27번이 부스스 일어나 홈런을 쳐 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울 리 없지. 내가 써 보낸 숫자 27은 계속 탈락, 탈락, 탈락. 칫.
내가 열심히 27번을 라디오에 적어 보내는 동안 27번은 서서히 타격 자세를 바로 잡아갔고 가끔 안타를 쳤다. 며칠 전, 야구 중계를 들으며 러닝을 하고 있었는데 동점 상황에서 27번이 타석에 올랐고, 놀랍게도 초구에 홈런을 쳤다.
‘내가 잘 못 들었나? 타석에 올라왔던 선수가 27번이 아니었나?’
뛰던 속도를 줄이고 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온몸의 에너지가 귀에 집중된다. 해설 위원과 캐스터가 홈런 타자의 이름을 다시 말해주길 기다린다. 맞다. 27번! 해설 위원은 선수의 바로 잡힌 타격 자세를 설명한다. 지금 선수는 천천히 홈으로 들어가고 있고, 롯데 자이언츠의 많은 선수들이 진심으로 그 선수의 홈런을 축하해 주고 있다는 캐스터의 설명도 덧붙여 나온다. 온몸에 찌르르 소름이 돋는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됐다, 됐어. 잘했다.’
27번이 우는 것 같기도 하다는 해설 위원의 말, 부진이 길었지만 잘 극복했다는 캐스터의 말을 들으며 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이 흐름으로 간다면 경기를 이길 것이고, 27번 선수가 아마도 수훈 선수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인터뷰를 하겠지. 27번 선수의 인터뷰를 들을 생각에 한껏 들떴지만 경기는 8회에 상대팀에게 홈런을 맞아 역전패로 마무리됐다.
팀은 졌지만, 27번이 살아난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27번 선수는 눈치 게임의 당첨운 없이도 (사실 말도 안 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부진했던 흐름을 스스로 끊어냈다. 그건 사실 어느 누구도 해줄 수 없고 스스로만 해결할 수 있다. 우리 팀이 경기에 진 날에는 하이라이트 영상을 다시 보지 않지만, 그날은 27번의 홈런 장면을 보고 싶어 하이라이트 영상을 봤다. 눈으로 보니 더 감동적이다. 천천히 뛰어서 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레전드는 슬럼프로 이루어진다>는 책을 보니, 여러 레전드 선수들이 자신이 겪은 슬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슬럼프를 겪고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떠한 슬럼프든 빠지자마자 벗어날 수는 없고 다만 태도에 따라 조금 빨리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레전드들은 (...)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성찰했다. 그리고 고독한 연습과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 어떤 선수에게나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레전드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연습과 훈련은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잡는 선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다. 레전드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슬럼프를 돌파해 나간다.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면서 연습과 훈련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책, p120)”
롯데에 부진한 선수들이 많다. 그들이 모두 자신을 믿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연습에 몰입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부진에 상관없이 응원하는 것. 음, 다음 주 화요일에는 어떤 선수의 등번호를 ‘눈치 게임’에 적어 보낼 것인가. 이렇게 번호를 적어 보내는 것만으로도 염원의 에너지가 선수에게 전달되는 것만 같다. 사실 적을 번호가 넘친다는 게 문제다. 53번, 52번, 22번, 25번, 34번 등등. 자자, 줄을 서시오.
(*이후에 27번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됐다. 난 지금 어딘가에서 재활을 하고 있을 27번을 응원한다. 27번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성실히 하며,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슬럼프의 터널을 뚜벅뚜벅 잘 지나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