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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0. 2024

실책

빨리 잊을 것, 반복하지 말 것. 

*실책: 

야구에서의 실책이란 충분히 수비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공을 놓치는 등의 실수로 공격팀의 타자나 주자의 진루를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실책은 크게, 쉽게 잡을 수 있는 땅볼이나 뜬 공을 놓치는 수비실책과 포구하는 사람이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송구를 하거나 잘 받을 수 있는 송구를 놓치는 송구 실책으로 나뉜다. 야구는 흐름의 경기이고, 멘털 싸움이기에 실책 이후에 상대편으로 흐름이 넘어가면 선수들의 멘털이 흔들리고 불리한 게임이 된다.     



야구를 볼 때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경우는 우리 팀 선수가 홈런을 칠 때가 아니다. 어이없는 실책을 할 때다. 홈런을 칠 때면 주먹을 쥐고 “아싸!”하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지만, 실책 할 때는 머리를 뜯으며 “으악!”하고 비명을 지른다. 연거푸 실책이 반복될 경우 집에 있다면, “꺼, 꺼, 돌려, 돌려.”라고 혼잣말을 하며 리모컨을 찾고, 직관하고 있는 경우에는 차라리 이때 화장실을 가겠다, 하며 밖으로 나간다.      



실책을 한 번도 안 해 본 선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실책 때문에 점수를 잃고 팀이 경기에서 패배를 한다. 그러나 그건 다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잊어야 한다. 스스로 자책하고 거기에 연연해 봤자 집중력만 더 흐트러질 뿐이다. 레전드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좋은 선수의 기본자세 중 하나는 잘 잊는 것이다. 실책 한 사실은 잊되,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림책 편집을 하는데, 한 번 인쇄할 때 몇 천권씩 인쇄하기 때문에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그림책의 경우 원고부터 전체 데이터가 넘어갈 때까지 열 번도 넘는 검토와 교정 과정을 거친다. 편집 담당자 한 명만 보는 게 아니라 몇 명이 돌아가며 다 같이 본다. 그래도 실수가 나온다. 인쇄 후 발견한 실수인데 넘길 수 있는 실수면, 그다음 인쇄 때 반영할 수 있게 메모해 놓고 그냥 넘기기 어려운 실수면 스티커 작업을 한다. 정말 큰 실수면 기존 책을 다 파기하고 다시 인쇄를 한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쭈뼛 선다.


      

‘자연관찰전집’을 편집할 때였다. ‘자연관찰전집’은 작가가 써 준 원고에 맞는 동물이나 식물 사진을 찾는데 많은 품이 든다. 내가 담당한 권 중 ‘고래’권이 있었는데 인쇄하기 직전, 필름 상태에서 실수를 발견했다. ‘혹동고래’ 사진인데 사진 설명에는 ‘범고래’라고 되어있다. 그걸 발견하는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무 민망하고 창피하고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눈물이  맺혔다. 딱 보면 혹동고래인데 왜 범고래라고 써진 설명을 그냥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결국 필름을 다시 뽑고 인쇄 일정이 조금 더 늘어졌다. 

‘드디어 이 바닥을 떠날 때가 왔다.’ 

후배들에겐 부끄럽고 선배들에겐 죄송했다.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때 담당 팀장은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다, 그냥 이번엔 네가 그런 것뿐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라고 했다.      



자신의 실수에 빠져 자책하지 말 것, 그리고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 어떤 분야든 실수에 대처하는 방법은 같은가 보다.      



난 비단 업무에서만 실수를 하는 게 아니다. 몇 년 전 했던 잊히지 않는 실수 하나가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생일 때다. 날이 더운 토요일, 급히 업무를 마치고 남편과 육아 교대를 하러 뛰어갔다. 남편은 합정에 있는 쇼핑몰에서 아이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도 일하러 가야 하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 마음이 초조했다. 최선을 다해 뛴 까닭에 많이 늦지 않았고 남편은 아이의 손을 나에게 건네고 회사로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긴장이 풀려 배가 엄청 고팠다. 뭘 해 먹을 기운이 없어 아이가 좋아하는 <북촌손만두>에 주문을 했다. 예전에도 몇 번 전철역에서 전화로 주문하고 음식을 픽업한 적이 있다. 북촌손만두를 검색했을 때 핸드폰 창 맨 위의 가게가 우리 아파트 바로 앞의 가게다. 

“비빔국수 세트 하나랑 갈비 만두 하나 주문할게요. 픽업해 갈 거예요. 5분 뒤에 도착해요.”



전철역에서 나와 집으로 간다. 만둣가게로 간다. 아이랑 하는 대화는 자꾸 깔때기처럼 ‘배고프다’라는 주제로 되돌아간다. 한 다섯 번쯤 ‘배고프다’란 말을 하고 나서야 만둣가게에 도착했다. 전화로 주문한 거 픽업하겠다고 하니 주인아저씨 눈이 휘둥그레진다. 

“주문 들어온 게 없는데요?”

“네? 제가 전화로 주문했는데요? 비빔국수랑 갈비 만두요.”

주인아저씨는 한 번 더 전화로 주문 온 게 없다고 말했고 난 같은 메뉴를 다시 주문했다.  머리가 조금 아팠다. ‘내가 다른 가게에 주문했구나. 그럼 그 가게에서도 음식이 나왔겠네. 그 가게가 어디지? 잘못 주문했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엄청 화내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한 손으로는 포장한 음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배고픈 나는 불편한 생각을 머리 한쪽으로 미뤄놓고 배를 채웠다.      



 비빔국수를 먹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 통, 두 통, 세 통. 또 다른 번호로 전화가 온다. 한 통, 두 통, 세 통. 핸드폰 진동이 지잉, 지잉 울릴 때마다 심장이 뛴다. 더는 비빔국수가 먹히지 않는다. 내가 다른 가게에서 주문한 식은 만두와 불은 국수는 누구에게도 팔지 못하고 버려질 것이다. 어디 있는지 모를 <북촌손만두> 가게 사장님은 나 때문에 12,700원의 손해를 보고 그보다 더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사과해야 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주문한 음식을 누구에게 팔았을 수도 있지. 난 이번 달 월급도 못 받았잖아. 에이, 몰라. 그냥 넘어가. 나는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소파 위에 놓았다.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아까 내 전화를 받았던 조선족 아줌마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아줌마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던데. 주문 잘못 받았다고 사장님께 혼난 건 아닐까. 내 얼굴을 모른다고 이래도 되는 건가. 내 돈만 소중하고 사장님 돈은 소중하지 않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흐른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다. 내가 뭘 한 거지. 순식간에 내가 비판했던 사람의 자리에 내가 서 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겉으로만 착한 척하는 사람.      



 내가 걸었던 매장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매장의 위치를 확인한다. 우리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 1층에 위치한 매장이다. 내일 가서 사과하고 배상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다짐은 하지만 사과할 용기가 안 나는데 어떻게 하지. 편지와 돈을 봉투에 넣어서 가게 문에 끼워 놓을까. 아니면 아이에게 전달하고 오라고 시킬까. 박카스도 들려 보내면 좀 더 나을까. 아니면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하고 대신 전달을 부탁할까. 결자해지(結者解之)가 이렇게 행하기 힘든 말이었다니. 회사에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에게 말해볼까 고민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평소에 착한 척 다하더니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할까 봐.      



 그다음 날은 일요일. 그날 만난 친한 언니가 얼굴이 안 좋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이 부끄러운 일을 이야기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더 책임감을 가지고 <북촌손만두> 사장님께 사과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니에게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한 후, 사과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는 자기가 전화해 주겠다며 매장으로 연락했지만 아쉽게 받질 않는다. 대형마트가 쉬는 일요일이라 같은 건물에 있는 만둣집도 쉬는 모양이다. 언니는 내일 아침에 자신이 전화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언니 아침부터 정말 미안해요매장은 10시에 오픈이더라고요매장 바빠지기 전에 전화 좀 부탁드릴게요참 그리고 사장님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바로 돈 부친다고 꼭꼭 전해주세요언니정말 고마워요제가 밥 살게요!     


 고맙고 미안한데 내가 사과할 용기는 없고 민폐 끼치는 것도 너무 싫은데 민폐를 끼치고 있는 이 상황이 날 지치고 기운 빠지게 했다. 다행히 언니는 금세 매장 직원과 통화를 마쳤고 나에게 사장님 계좌번호와 입금 금액을 전달해 주었다. 입금하고 나니 뭔가 큰일을 마친 기분이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속상하다. 이런 작은 일로 양심이 왔다 갔다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하는 내가 찌질해서 속상하다.      



 내가 처음 다른 가게에 주문한 걸 알았을 때, 바로 전화를 했더라면. 오히려 내가 그쪽에 ‘매장을 잘못 알고 주문했어요. 죄송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하고 물었다면. 그럼 그쪽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았을까. 내 잘못을 덮고 싶은 욕심이 일을 키웠다. 잘못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점점 커진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스스로 수습하기도 어려워진다. 뉴스를 보며 내가 비판했던 사람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특별히 더 나쁘거나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했을 때 빨리 인정하기,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노력하기, 이전의 실수로 자신을 폄하하거나 자책하지 않기.      



어제도 실책이 많은 야구. 실책 한 선수들이 모두 뻔뻔해지기를. 언제 실책 했나, 싶게 잘해주기를. 실책은 그 한 경기에만 영향을 미칠 뿐. 다음 경기는 또 다른 시작이다. 지금 선수들은 또 다른 경기에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수비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실책이 반복되어 야구 선수 인생 자체가 어렵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 또한 편집하며 실수를 반복해 내 편집 인생이 마무리되지 않도록, 일상에서 실수를 반복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와 멀어지지 않도록, 오랜만에 실수 경험담을 기록하며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를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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