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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1. 2024

KBO 올스타전

즐거움엔 힘이 있다

*KBO 올스타전: 

야구 시즌 중간,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열리는 스페셜 경기이다. 이때 정규 시즌 경기는 잠시 쉰다. 전 구단의 인기 선수들을 한 자리에서 다 볼 수 있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축제의 장이다. 1982년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열렸으며, 팬들과 야구 전문가들이 투표해 참여 선수를 뽑는다. 24년, 롯데자이언츠는 팬들의 투표로 윤동희와 황성빈이, 감독 추천으로 박세웅, 김원중, 정보근이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 이외에도 홈런더비, 썸머레이스, 퍼포먼스 등 다양한 이벤트가 있다.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야구 경기가 있으니, 바로 시즌 중간에 치러지는 올스타전이다. 팬들은 경기 한참 전부터 올스타전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인지 기대한다. 닮은 꼴 연예인 코스프레를 하거나 동물 인형 탈을 쓰기도 하고,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등장해 팬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한다. 그야말로 모두 함께 즐기는 야구다. 전반기의 부담을 훌훌 털고 잠시 쉬어간다.      



평소와 달리 활짝 웃으며 그라운드에 등장하는 선수들을 보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지금은 모두 진지하게 야구를 하는 프로 선수들이지만, 그 처음은 분명 즐기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난 어떤 일을 할 때 최선, 열정, 투지, 노력, 뭐 이런 것에 엄청 가치를 두는 편인데 올스타전을 보며 즐기며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재작년 여름, 같은 출판사에 다녔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는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 집 근처에 생태(환경) 관련 책을 주로 취급하는 서점을 냈다. 선배가 자기 서점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과 중학생 몇 명을 모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할 건데 우리 아이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기회가 좋은 것 같아 참여하겠다고 했다.     



아이는 그해 여름, 열 번 정도 모임을 하며 스토리를 짜고, 노래 가사를 지어내고, 샌드아트로 이미지를 구성하며 간단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그렇게 그 여름이 지났고 난 선배에게 수고 많으셨다 말하고 끝이 났는데...... 일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선배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서울동물영화제 단편 경쟁 부분에 그 작품이 올라갔다고 했다.     



가족이 함께 서울동물영화제를 하는 홍대 메가박스에 가서 아이가 만든 작품을 보았다. 단편 경쟁작 6개를 모아 함께 상영했다. 모든 영화가 끝나고 관객에게 가장 좋았던 작품에 투표를 하라고 했는데, 난 소신 있게 아이가 만든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에 투표했다. 사람들은 아이를 감독이라고 불렀다. 6명의 아이들이 함께 스토리와 이미지를 만들어 찍었으니 6명이 다 감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감독과 관객과의 시간에 우리 아이도 무대에 올라가 관객들이 하는 질문에 대답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축하한다, 정말 운이 좋았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며칠 지나 선배에게 또 전화가 왔다. 월요일 저녁에 폐막식이 있는데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별일 없으면 우리 아이도 오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주최 측에서 연락을 준 걸 보니 김칫국을 마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관객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아이를 안 보낼 수 있을까. 폐막식은 초대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어서 아이를 행사장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근처 카페에서 폐막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믿기 어렵게도,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만든 작품이 관객상을 받았다. 상금도 200만 원이나 됐다.      



어쩜 이런 일이 있나. 아이가 특별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건 정말 열심히 영화를 찍은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관객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 영화 본 다음, 제일 좋았던 영화에 투표할 때 네가 만든 영화에 투표했어?”

“아니. 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투표했어.”

“정말?”

“응. 난 그게 제일 좋았거든.”

“그랬구나. 엄마도 그게 제일 좋았어. 오, 너 투표 솔직하게 했는데!”

난 아이가 관객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도 하지 않았던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여 말했다. 

“너네가 관객상을 받은 건 잘했다기보다는 격려의 의미에서였을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가 환경이나 생태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아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또래 아이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힘든 과정을 거쳐 피땀을 흘리는 노력만이 가치 있는 건 아니다.      



지하철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아이를 툭툭 쳤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동안 수고 많았어. 정말 축하해. 우리 딸이 짱이야.”

“응, 근데 이건 뭐 그냥 격려의 의미로 받은 상이니까.”

아이는 아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뱉고 다시 앞을 본다. 나의 말이 아이의 생각이 되어버렸다.      



정말 즐거워서 하는 일은 힘이 있다. 그 힘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재미있으니 계속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애씀과 노력의 처음은 즐거움, 재미일 경우가 많다... 는 뭐 이런 말을 할 기회를 놓쳤다.      



난 어느새 나보다 훌쩍 큰 아이의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아이의 즐거움을 무시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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