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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5. 2024

병살타

야구 안에 있는 희로애락 

*병살 또는 더블플레이(double play): 

노아웃 또는 1 아웃 이상인 상황에서 타자의 타격 후,  수비수가 그 타구를 잡아 2명의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로 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나온다. 이때 병살의 원인이 되는 타자의 타격을 병살타라고 한다.


      

주말인데 업무 카톡이 들어왔다. 

-교정 보실 때 ‘아이참’, ‘에이’ 또는 부정적인 표현은 다 빼주세요.      



부정적인 표현이 들어갔다면 그 표현이 들어간 이유가 있을 텐데. 필요 없이 들어갔다면 빼야겠지만 맥락에 자연스럽다면,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하는 과정까지 들어갔다면, 빼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림책 원고를 쓰거나 편집할 때 부정적인 표현을 빼라는 지적은 하루 이틀 들은 피드백이 아니다. 어떤 출판사 원고를 쓸 땐 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주인공 여자아이가 짜증 내는 장면을 빼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짜증을 내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추스른 후 문제 해결하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그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짜증 내는 장면만 들어내니 주인공은 내 주변에 없는 평면적인 인물이 되었다.      



출판사가 수정을 요청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그런 장면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팔아야 하는데 책을 사는 부모들이 그런 장면을 좋아하지 않으니 고객의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다. 나는 이름 있는 작가도 아니고 그림책 전집 중 한두 권을 쓸 뿐이니 내 입장을 고수할 처지도 아니다. 그저 ‘네네, 알겠습니다.’ 한다. 


     

생각한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짜증이 나는 건 당연한 심리다. 그런데 그림책에서 짜증 내는 장면을 이렇게 접하기 어려워서야. 현실에서 아이는 짜증이 날 때 그 감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그 감정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부모들은 학교에만 전화하는 게 아니다. 그림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출판사에도 전화한다. 왜 주인공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지, 동화책 속 공주가 못생겼는지, 창작동화에 나오는 고양이의 발가락 개수가 실제와 다른지 항의한다. (내 컴퓨터 속 그림책 폴더 중 하나에는 동물들의 발가락 개수가 정리된 파일이 있다.)      



그러나 짜증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내 아이의 짜증이 힘든 건 사실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땐 모든 문제에 딴지를 건다. 

“아니, 요리하는데 왜 당근을 깍둑썰기 해서 쌓기 나무를 하는데?”

“왜 이 둘레를 내가 구해야 하는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문제집을 소리 나게 넘기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는 동그라미를 하도 쳐서 구멍이 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그러다 오은영 박사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는 동영상을 봤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 사람의 감정이므로 그 사람의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감정까지 떠안으려고 하지 말아라. 또, 부정적인 감정도 스스로 진정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의 짜증을 인정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예전보다 아이에게 관대해진다.

“엄마도 어렸을 때, 수학 문제집 푸는 거 싫어했어.”

“정말?”

아이의 눈이 커진다. 반가움이 가득한 눈. 

“응, 그래도 어쩌다 풀리면 기분 엄청 좋지 않아?”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치’라고 말하며 입을 내민다. 짜증은 아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이다. 피할 수 없다.      



아이가 책에서도 짜증 내는 주인공을 많이 만나면 좋겠다.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그런 감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좋겠다. 

“아니, 이런 장면을 왜 넣었어요?”하고 출판사에 전화하는 게 아니라 짜증이란 감정도 그 짜증을 푸는 과정도 함께 배우면 좋겠다. 아이들이 보는 책이 삶과 동떨어져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에 비하면 야구는 얼마나 삶과 밀접한가. 야구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선수들의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며 즐거워하고 점수가 나면 기뻐하고 실책을 하면 화를 내고 역전패를 당하면 화를 내다 슬퍼한다. 물론 짜증도 있다. 팬들의 짜증을 유발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바로 병살타다. 우리가 공격일 때, 원 아웃 상황의 비교적 기회가 많은 상황을 한 번에 정리한다. 한 번에 끝낸다.      



예전에 스코어 1: 1, 9회 말 1 아웃 만루 상황에서 A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은 경기가 끝날 걸로 예상하고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뿌리며 승리를 자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A 선수가 친 내야 땅볼이 병살타가 되어 아웃 카운트 2개가 올라갔고 3 아웃이 되어 바로 이닝이 끝나버렸다. 연장전으로 가게 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짜증이 아주 제대로 났다.

경기는 연장 11회까지 이어졌고 11회 말, 투아웃 상황 중요한 순간에 다시 A 선수가 타석에 섰다. 또 중요한 기회를 날릴 것 같아 화면을 볼 수가 없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TV에서 들리는 ‘와!’하는 함성소리. 그 선수가 안타를 쳤고 롯데가 1점을 더 내서 게임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제가 병살타를 쳐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다시 기회가 올 것이고 그 기회가 오면 꼭 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게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습니다.”

A 선수는 인터뷰에서 10년 이상 야구를 하다 보니 큰 실수를 한 후에는 반드시 만회할 기회가 온다는 걸 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야구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다. 짜증이 해소되고 풀리는 순간. 함께 슬퍼하고 환호하는 순간. (속닥속닥)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성품을 단련하는데 아주 적절한 팀이다. 삶에서 짜증과 슬픔, 분노를 경험하기 전에 미리 대처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예방 주사를 맞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롯데 팬들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다. 사직 야구장이 괜히 세상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 된 것이 아니다. (사직 야구장의 별명 중 하나는 사직 노래방이다) 그곳에 가면 팬들의 슬픔과 분노가 노래로, 응원가로 승화되는, 동화책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슬픔과 분노만 있는 건 아니다. 기쁨과 환희도 있다. 롯데 팬은 기쁨과 환희는 항상 있는 디폴트 값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그 감정이 찾아왔을 때 아주 열심히 누려야 한다는 것도 안다. 행복이 우리 삶의 디폴트가 아닌 것처럼.      



어떤가, 당신. 이 글을 읽으니 롯데 자이언츠 팬이 되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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