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짝사랑
유니폼 뒤에 응원하는 선수의 이름을 부착하는 것을 말한다. 마킹은 고온의 열프레스 기계로 마킹지를 눌러 부착하는 열프레스 방식과 마킹지를 박음질해서 부착하는 자수 방식이 있다. 열프레스 마킹의 경우, 야구장 굿즈샵에서 유니폼을 구매한 후 원하는 선수의 이름을 골라 바로 마킹이 가능하다. 자수 마킹은 야구장 굿즈샵에 원하는 선수의 자수 마킹 유니폼이 없을 경우, 보통 전문 자수 업체에 의뢰한다.
딸은 롯데 자이언츠의 윤동희 선수를 좋아한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타격감이 좋아 거의 매 경기 선발로 출전한다. 하얗고 깔끔한 피부를 가졌고 키가 크다. 배구 선수 김희진을 닮았다. 딸은 곧 사직 구장에 가서 윤동희 선수 이름을 유니폼 뒤에 마킹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홈구장에서만 해당 구단 선수 이름을 마킹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 집에는 6벌의 유니폼이 있는데 2벌에는 이대호 선수 이름이 있고, 다른 4벌에는 마킹이 되어 있지 않다.
“야구팬들이 누구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구매한 유니폼 뒤의 이름과 번호다. ~ 경기장에 입고 오는 유니폼은 매우 직관적으로 이 팬이 어느 선수에게 반했는지를 보여준다. 구단별로 매년 유니폼이 가장 많이 팔리는 선수를 집계하기도 하고 판매 금액의 일부가 선수에게 연봉과는 별도로 지급된다. 팬들이 ‘어느 선수의 이름을 판다’는 표현을 쓰는 유니폼 구입은 오랫동안 묵혀 온 팬심의 발현이기도 하고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에게 보내는 어느 팬의 소리 없는 환호성이기도 하다.” <야구도 널 사랑해 줬어 (p266)>
야구 중계를 보다 윤동희 선수가 나오면 “시내야, 니 남편 나왔다. 얼른 와서 봐.”라고 딸을 부르고 그 선수가 실책을 하면 “니 남편 대체 왜 그러니?”하고 장난을 친다. 학창 시절 때 나 혼자 짝사랑하는 오빠가 운동장에 축구하러 나오면 친구들은 “야, 니 남편 나왔어!”하고 날 창가로 불렀다. 그 오빠는 나의 존재도 모르는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윤동희 선수는 딸을 모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윤동희가 수훈 선수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고 딸에게 “오, 네 남편 인터뷰한다!”라고 말하니, 딸이 한숨을 쉬며 묻는다.
“윤동희 보고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 엄청 많겠지?”
“그럼, 윤동희 부인이 몇백 명은 될걸.”
큭큭. 웃음이 났다. 윤동희는 자신의 부인이 몇백 명이나 된다는 걸 알까.
그런 얘기를 딸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릴 적 내 짝사랑들이 생각났다. 그 당시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됐던 수많은 짝사랑 상대들.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학창 시절은 수많은 웃음과 설렘, 눈물과 시기, 질투, 연민의 이야기로 풍성해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태권도장에서 만난 이모군을 짝사랑하면서 나의 지난한 짝사랑의 서사는 시작되었다. 그 뒤로 나의 짝사랑은 매년 상대를 바꾸며 이어졌다. 대부분 같은 반의 반장이 내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5학년 때,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바로 민군. 민군은 까맣고 마르고 얼굴도 키도 작은 게 꼭 알밤처럼 귀여웠다. 쌍꺼풀이 없지만 그다지 작지 않은 눈이 매력적이다. 공부도 잘하고 잘 웃고 친절하다. 난 당시 키도 크고(그때 키가 지금 키다) 얼굴도 하얘 인기가 있었다. 반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내가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시절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출처가 모호한 쪽지들이 전달되었고 소풍을 가면 남자아이들이 자신이 싸 온 김밥을 먹어보라며 내 도시락에 자신의 음식을 놓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민군은 인기 순위에도 없었던 모범생 A를 좋아했다. 조용한 A가 왜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그는 오늘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뭐 이런 문장이 가득한 일기를 쓰며 이불속에서 울곤 했다.
5학년 때는 민군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6학년이 되니 상황 전환이 필요했다. 민군과 다른 반이 되어 만날 기회가 아예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원군이 필요하다. 친한 친구들에게 사실 내가 민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친구의 연애가 모든 것에 우선했던 걸까. 친구들은 열성적으로 내게 민군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어제 민군 수학학원에서 100점 맞았대.”
“오늘 민군 반 남자아이들이 13단지 놀이터에서 놀기로 했대.”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민군이 노는 놀이터에 함께 가 주었다. 멀리서만 봐도,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풍을 갔다 오면 우리 반 단체 사진은 안 사도 친구를 통해 민군 반 단체 사진은 샀다.
6학년 2학기, 민군과 친한 송군과 짝이 되었다. 난 짝에게 민군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좀 도와달라고 했다.
“민군이 아직도 A를 좋아하는 거 같아? 한번 물어봐봐. 내가 물어보라고 했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다음 날 내 짝은 바로 “이제 A 안 좋아한대. 안 좋아한 지 오래됐다는데?”라고 말했다. 충실한 지원군이었다. 나는 우리 반에 돌고 있는 앙케이트지를 내밀며 부탁했다.
“걔한테도 이거 써달라고 해 줄 수 있어?”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연예인, 좋아하는 음식 등 별 의미 없는 질문들이 쭉 나열되다 거의 끝부분에 좋아하는 사람을 쓰는 문항이 있는 조잡한 앙케이트지였다. 내 짝은 흔쾌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받아 본 민군의 앙케이트지 마지막 문항에는 몇 명의 이니셜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내 이니셜도 있었다. 뭔가 될 듯 될 듯 희망찬 나날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난 아예 짝에게 “민군에게 내가 걔 좋아한다고 말해 줘. 그럼 뭐라 말이 있겠지.”라고 했다. 다음 날, 나의 충실한 지원군은 당당하게 희소식을 안고 나에게 돌아왔다.
“야, 걔도 너한테 관심 있대!”
오! 마음속에서 팡파르가 울리고 폭죽이 터졌다.
그 후로 며칠 뒤였나, 몇 주 뒤였나, 민군이 곧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뉴질랜드 오클랜드. 지도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와 아주 멀고도 멀었다. 슬프기보다 당황스럽고 어이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잘 풀릴 리가 없지.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난 심각한 자기 연민에 빠졌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중학생이 되었다. 어머나, 이게 웬일. 중학교에 가니 멋진 오빠들이 엄청 많다. 멋진 오빠들 사이에서 큰 교복을 입은 민군은 땅꼬마 같았다. 민군을 향한 내 마음은 급격히 식었고 언제 간 줄도 모르게 민군은 이민을 갔다. 사랑은 변하는 거다.
몇 달 뒤, 난 민군을 까맣게 잊고 다른 오빠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민군에게서 편지가 왔다. 민군은 두세 달에 한 번씩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고등학교 때는 민군이 잠깐 한국에 나와서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생이 된 민군은 키가 훌쩍 컸고 작았던 얼굴은 그대로 작았다. 멋진 오빠들 못지않았다. 난 매일 친구들에게 옷을 빌려 가며 열심히 민군을 만났다. 그러나 민군이 다시 뉴질랜드로 간 후에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내가 뚱뚱해져서 그런가. 키가 작아 그런가. 사람의 외모만 보고 말이야. 치사하다, 치사해.’ 난 연락 없는 민군을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민군을 다시 본 건 대학교 2학년 때. 난 KBS2 TV에서 토요일 저녁마다 방영하던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이란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 속 강호동이 진행하던 <서바이벌 미팅>이라는 코너가 재미있었는데 남녀 대학생이 5명씩 나와 킹카와 퀸카를 뽑아 커플이 되는 코너다. 깔깔 웃으며 TV를 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익숙한 얼굴 아래에 ‘미국 A대 의대 민**’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앗. 민군이다. 미국에 있는 A대 의대라니, 다른 세상 사람이 됐네. 그날 방송에서 민군은 킹카로 뽑혔다. 싱숭생숭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작년인가, 딸이 내 앨범을 뒤적이다가 어릴 적 단체 사진 한 장을 꺼내며 물었다.
“엄마, 이 사진에 엄마가 어딨어? 아무리 찾아도 없어.”
“어머, 너 어떻게 엄마를 못 찾니?”
핀잔을 주며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을 보니 민군 반의 소풍 단체 사진이다. 웃음이 픽 났다. 아직도 가지고 있구나.
“이건 엄마 친구네 반 사진이어서 엄마가 없어.”
“엄마도 없는 사진을 왜 가지고 있어?”
“그러게.”
아이와 이야기하며 눈으로는 사진 속 민군의 얼굴을 찾는다. 시간은 정말 빠르기도 하지. 민군과의 어떤 에피소드들은 며칠 전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내 딸이 중학생이라니.
난 이렇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짝사랑을 했으면서, 아이가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걔랑 사귈 거야.”라고 말하면, ‘쯧쯧, 요즘 아이들이란.’하고 생각한다. 민군과의 에피소드를 회상해 보니 민군을 좋아하며 느꼈던 외로움과 연민, 쓸쓸함, 질투, 설렘, 기쁨 등의 감정은 커서 연애할 때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떤 감정은 그때의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성인 때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가서 남자 친구를 사귀는 딸과 딸의 친구들을 보며 “아니, 중학교는 이성 친구랑 사귀려고 간 거야? 왜 이렇게 다들 사귀고 난리야?”라며 툴툴댔는데 글을 쓰다 보니 조금 머쓱해진다. 나도 짝사랑했던 남자들이 사귀어주었다면 사귀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귀어주지 않아서 사귀지 못했을 뿐.
내 학창 시절을 잘 기억하며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다 적어놓아야지. 그래, 딸아, 야구 선수든 남자 친구든 좋아할 수 있을 때, 열정이 있을 때 실컷 좋아하렴. 조만간 사직 구장에도 가자꾸나.
“어른이라면 자신이 지금의 자기 자녀만 한 나이였을 때에 뭘 했고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깊이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란 그것뿐이다.”
<찰리 브라운과 함께 한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