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의 소중함, 평상시의 소중함
관용적으로 가을야구는 포스트시즌을 말한다. KBO리그의 정규 시즌 종료 후 리그 상위 5위권에 들어간 팀들이 최종 우승팀을 결정하기 위해 벌이는 경기의 총칭이다.
대체 가을 야구가 뭐죠? 롯데 자이언츠는 2017년 이후로 가을 야구에 가지 못했다. 9월이 되면 롯데 자이언츠가 가을 야구에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셈해 본다. 5위와는 몇 경기 차이가 나는지, 잔여 경기는 몇 경기가 남았는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계산은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아, 우리의 야구는 곧 끝나겠구나. 시무룩한 내 모습을 본 남편이 한 마디 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 팀을 하나 정하자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리도 내년엔 가을야구 갈 거라고.
작년에도 했던 말을 또 한다.
사실 야구 시즌이라고 매 경기 챙겨보는 것은 아니다. 일이 있으면 못 볼 때도 있고 나중에 하이라이트만 볼 때도 있다. 그래도 지금 이 시간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 내가 보려고만 하면 볼 수 있다는 건 뭔가 든든한 느낌이다. 날이 쌀쌀해지면, 곧 야구를 못 볼 생각에 우울해진다. 야구 시즌일 때보다 야구 비시즌 때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구나.’를 느낀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면, 야구를 못하는 삼미 선수들을 욕했던 주인공이 막상 그들이 방출되자,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거짓말처럼 흰 눈이 내렸던 그해의 크리스마스 날, 삼미는 27명의 선수 중 11명을 방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미워했던 그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p85)”
어쩌면 애정이나 사랑은 부재할 때나 위기 상황에서 더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내 딸의 사랑을 절실히 느낀 것도 위기 상황에서였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에에에에 앵앵~
엄청 큰 사이렌 소리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자던 아이가 깨서 거실로 나왔다.
“엄마 이게 무슨 소리야?”
잠시 뒤 사이렌 소리는 잦아들었다.
“응. 옆 아파트에서 잘 못 울렸나 봐. 더 자. 아직 일곱 시도 안 됐어.”
아이가 다시 방에 들어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삐익! 하는 재난 문자 소리가 났다. 아이는 엄청 놀라서 ‘으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허둥지둥 거실로 나왔다. 아이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니 정신이 번쩍 났다.
“괜찮아,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 재난 문자 확인해 보자.”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고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문자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게 하라고. 그런데 어디로? 무슨 이유로?
아이는 며칠 전 전쟁이 나는 꿈을 꿨다. 그때 아이가 울면서 무섭다고 해서 난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 말라고 다독였는데 이렇게 정말 전쟁이 나는 건가. 아이가 우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현실감이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에에엥~ 다시 사이렌 소리가 나고 뭐라 뭐라 방송이 나온다. 지지직거려서 방송 내용은 잘 들리지 않는다. 하필 이럴 때 남편은 집에 없다. 테니스 클럽에서 가평으로 엠티를 갔다. 이런 된장.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얼른 옷부터 입자.”
아이에게 츄리닝 바지를 건네주었다. 언제 속옷을 갈아입게 될지 모르니 속옷도 갈아입고 편한 츄리닝 바지를 입는다. 그러고 세수를 하고 스킨을 바르며 드는 생각. 아. 똥을 못 쌌는데 피난 가게 생겼네. 가다가 똥 마려우면 어쩌지. 다시 재난 문자를 확인한다. 우선은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 지금 당장 대피는 아니고,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말이지? 그럼 가방부터 챙겨야겠다.
“시내야, 속옷 챙겨. 그리고 렌즈도 챙기고.”
또 드는 걱정. 아이는 밤에 드림 렌즈를 껴서 시력을 교정하는데 전쟁 중에 과연 밤마다 렌즈를 낄 수 있을까? 렌즈를 못 끼면 아이는 눈 뜬 장님인데. 큰일이네. 아이는 자신의 속옷과 침낭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난 스킨과 로션을 챙긴다. 전쟁 중에도 피부염이 생기면 안 되니까. 대용량으로 사다 놓을 걸. 후회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 생리가 끝났다는 것. 아이도 생리 중이 아니라는 것. 그래도 어떨지 모르니 생리대를 챙긴다. 여행 갈 때 짐 싸는 것과 비슷하다. 재난 가방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시내야, TV 좀 틀어 봐.”
이제야 TV 생각이 났다. 챙기던 가방을 내려놓고 TV 앞으로 갔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얘기, 서울에 경계경보가 발령됐다는 얘기. 뉴스를 보니 아주 급박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
조금 뒤 또 삐익! 아. 이렇게 시끄럽고 소름 끼치는 소리라니. 문자를 확인하니 경계경보가 오 발령이라는 문자다. 휴우, 다행이다.
“엄마, 나 손 잡아 줘.”
평소엔 엄청 독립적이던 아이가 손 잡아달라고 하고 안아달라고 한다. 갑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 내가 어쩌자고 아이를 낳았나. 세상에 이렇게 사랑하는 존재를 만들다니.’
아이만 무사하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생의 전화가 왔다. 동생은 아들 둘을 깨워 옷을 입히고 버스 정류장까지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 집에 TV가 없잖아.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네이버도 먹통이고. 그래서 전쟁인 줄 알았지. 애들 깨워서 여권이랑 돌반지랑 먹을 것만 챙겨서 나왔어.”
“넌 짐 챙길 줄 아는구나! 난 속옷이랑 로션이랑 그런 거 챙겼는데. 지금은 집에 온 거야?”
“아니, 돌아가는 중. 허겁지겁 나와보니 경찰서 앞에서 경찰들이 평화롭게 담배 피우고 있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카트 타고 징~ 이동하고 있고. 아무 일도 없더라고.”
푸하하하 웃음이 났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아이는 아침도 잘 먹고 평소와 같이 학교를 가려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잘 다녀와.” 하고 껴안아 주니 또 눈물을 터트렸다.
“오늘은 엄마 나가지 말까? 집에 있을까?” 하니 “응응.”한다. 나도 눈에 눈물이 찼다.
가끔 그날 생각이 난다.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겠니, 핸드폰 좀 덜 해야 하지 않겠니, 다른 집들도 티격태격하는 이슈로 딸과 밀땅을 하다가, 한숨을 쉬다가, 혼자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러면 또 뒤늦게 딸아이의 방에 살금살금 들어가 “뭐 필요한 거 없어? 과일 먹을래?”, “엄마는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해.” 이런 말을 뜬금없이 던지고 나오는 것이다.
평상시의 소중함, 있을 때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항상 가을 야구에 가는 팀의 팬들, 그러니까 별 다른 생각 없이 긴팔 유니폼을 사고 가을까지가 정규시즌인양 긴 야구를 즐기는 팬들. 가을 야구의 소중함을 알지어다. 아, 올해는 유난히 가을 야구가 참 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