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생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
KBO리그 구단의 2차 팀으로, 주로 훈련 및 개발을 목적으로 하며 선수들의 역량을 키우는데 중점을 둔다. 대부분의 프로구단은 2군에서 성적이 좋은 선수는 1군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1군 선수가 성적이 나쁘면 2군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경쟁 체제로 팀이 운영된다.
“1991년에 8 구단 체제가 되면서 정식으로 2군 리그도 창설되었다. 그전에는 2군이 없는 팀도 많았고, 대학 야구팀과 연습경기를 하곤 했다. 이동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북부리그와 남부리그로 나눠서 운영했다. “1군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때 2군은 설렁탕을 먹는다”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예나 지금이나 2군 선수들은 서럽다.
“우리도 아마추어 때는 “야구천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프로에 오니 평범해지네요.”
“몇 년 해도 발전이 없으면 2군에서도 방출되고, 평생 해온 야구를 그만둬야 하죠.”
내일의 장종훈과 김현수를 꿈꾸는 그들은 무시보다 무관심이 더 힘들다.”
<다시 그리는 한국 프로야구사 (p119)>
나는 성격이 급하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따라주지 않아 스스로 답답할 때가 많다. 테니스를 배울 때도 공이 나에게 오길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공에게 달려들어 코치님께 여러 번 지적을 받았다. 연애할 때 남자친구가 약속에 늦으면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고 화가 나 엉엉 울기도 했다. 기다리는 걸 잘 못 하는데 원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얻은 적은 거의 없다.
고등학교 때 원하는 동아리에 들어간 것도, 대학에 들어간 것도, 회사에 입사한 것도 처음엔 떨어지고 항상 두 번째였다. 결혼도 또래 친구들보다 늦어 전전긍긍했고 내가 프로젝트에만 투입되면 프로젝트가 뒤집어져, 완성된 프로젝트는 아주 뒤늦게야 할 수 있었으며 승진도 늦게 된 편이었다.
여행 중이었던가. 짜증이 좀 났는데, 짜증의 원인을 찾다가, 여행의 많은 부분은 기다림으로 채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게다가 그 시간은 종종 지연되고. 비행기를 타면 식사 시간을 기다리고, 화장실 줄이 없어지길 기다리고, 도착하길 기다리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내려서는 입국 심사받기를, 짐을 찾기를, 택시를 기다린다. 아. 나는 기다리려고 여행을 왔던가.
내가 기다리는 걸 잘 못하는 까닭에,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을 보면 그 일이 내 일인 양 공감이 되고 안타깝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1군에서 불러주길 기다리는 2군 선수들 같은.
롯데자이언츠의 유튜브 채널인 ‘자이언츠 TV’에는 ‘덕아웃멘터리’(다큐멘터리 느낌의 영상)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간혹 올라오는데 얼마 전 ‘1군과 퓨쳐스(2군)의 차이’라는 덕아웃멘터리 영상을 봤다. 1군과 2군을 왔다 갔다 하는 선수들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있었다.
1군에 있는 포수 자리는 단 두 자리이다. 실력이 좋아도 베테랑 포수가 1군에 있으면 신인은 올라가기 힘들다. 영상에는 작년에 상무에서 재대한 포수 손성빈의 인터뷰가 있다.
“1군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좋은 결과가 있어야 계속 있을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1군에 콜업되면 진짜 안타 치고 싶고 수비 나가서 실수 안 하고 싶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엄청 쫓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결과도 안 나오고 그럼 좀 힘들다. 자리 잡기가.”
가끔 ‘요즘 2군에선 누가 잘하나’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해주는 2군 경기를 보곤 한다. 그런데 2군에서 잘하는 선수가 1군에 와서 좋은 점수를 못 내고 다시 2군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영상을 보니 그 이유가 바로 ‘불안감’ 때문인가 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1군에 올라온 2군 선수 같다. 눈앞의 결과에 급급하다. 난 정말 빨리 될 줄 알았다. 응모하기만 하면 공모전에 당선되어 주변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는 상상을 아주 여러 번 했다. 그런 지 벌써 8년이 되어간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글쓰기를 해 보기 위해 동네 책방에서 하는 ‘내 삶 내 글’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참여자들과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한 후, 책방지기가 책상 위에 ‘니즈 카드’를 쭉 펼쳐놓았다. 현재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카드를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내가 고른 카드는 <능력, 자신감> 카드였다. 내가 항상 가지고 싶어 하는 능력과 자신감. 책방지기는 자신이 고른 카드에 대한 글을 쓰라고 했다. 주어진 시간은 총 20분이다. 가볍게 생각나는 대로 쭉쭉 적어 내려갔다. 아래는 내가 쓴 글의 일부다.
***
요즘 매일 쓰는 글의 대부분은 나를 독려하는 글이다. 자신감을 갖자, 힘내자, 더 노력하자, 이런 글들. 얼마 전에 남편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기대를 하지 마. 너랑 나랑 결혼해서 쟤가 나왔는데 쟤가 공부를 잘하겠니?”
“내가 뭐? 내가 왜?”
그러나 사실은 나도 어느 정도 동의가 돼서 더 빈정이 상했다.
기억나는 일이 또 있다. 최근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는데 남편에게 그 말을 하니 남편이 “잠깐만. 나 잠깐 웃고 니 얘기 다시 들어도 될까.”라며 푸하하 웃었다. 나도 웃음이 나서 같이 웃었다. 내가 신청했던 영어 프로그램 비용을 다 합하면 중고차 한 대는 뽑았을 거다.
꾸준하지 않고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니 영어 공부도 업무 능력도 쌓이지를 않는다. 능력과 자신감을 손에 쥐려면 먼저 꾸준함이 필요하다. 아이는 아이만의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났을 거다. 그게 무엇이든 꾸준한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
대략 이런 글을 쓰고 낭독을 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내 글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대화체가 들어가니 좋다는 말, 의지가 강한 사람인 것 같다는 말. 이제는 책방지기가 이야기해 줄 차례다.
-남편과의 대화 중에서 남편이 푸하하 웃었고 본인도 따라서 웃었다는 부분 있잖아요. 전 그 부분이 슬펐어요.
아.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왈칵 눈물이 났다. 난 남편과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책방지기는 왜 슬펐고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왜 눈물이 나지? 생각은 감정 뒤에 따라오는 건지 나조차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모두 가만히 날 기다려준다. 조용하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먼저 입이 열렸다.
-제가 지금 이 시기를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고요. 완전한 나는 나중에 완성된다고요.
자유자재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나, 이름 있는 작가가 된 나,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나, 숨차지 않고 자유형을 하는 나. 이게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나인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지금의 나를 무시하고 얕본다.
항상 원하는 결과를 기다리며 살았고 현재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기다리는 도중에 삶이 끝나면? 그렇다면 무의미한 삶인가?
현재를 사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의 나를,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내가 아닌 열심히 하는 나, 충실히 뭔가를 하는 나의 태도로 평가하기로 했다. 과정에서의 내 태도에 가치를 두기로 말이다.
사실 기다린 끝에 손에 쥐는 결과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결과는 항상 또 다른 무대에 오르는 문이 되고 그 무대에 오르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기다리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도 그렇지 않은가. 대학만 입학하면 살도 빠지고 잘 생긴 남자 친구도 생기고 꽃길만 걸을 줄로 알지 않았던가. 그러나 대학 입학 후에는 좋은 학점, 졸업, 취업, 승진 등으로 계속 기다리는 목표가 바뀌었고 목표와 무대가 바뀔 때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기다리는 결과보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2군에 있다가 기다렸던 1군 콜을 받았음에도 ‘불안감’에 1군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2군에 내려오는 선수들이 있는 것처럼 자신이 어디에 서있든 자신의 성실한 태도와 연습을 믿고 긴장을 털어내야 한다. 믿을 것은 그것뿐이다.
올해도 9월에는 신인드래프트가 있었고, 한바탕 시끌벅적한 행사가 끝난 며칠 뒤, 방출 명단이 발표되었다. 신인이 들어오면 기존의 팀원 중 누군가는 팀에서 나가야 한다. 우리 팀의 방출자를 한 명씩 봤다. 모두 올해 1군 기록이 없다. 1군 콜업을 기다렸던 그들의 상황을 상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조금 뒤 그건 내 오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고 이 일은 그들에게 전화위복이,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성공만 할 수는 없고 그 길로 가는 와중에 실패도 하고 지기도 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한다. 누구나 그런 시간은 있고 그걸 어떻게 넘어가느냐는 그 사람의 몫이다. 아무쪼록 기다림의 시간 끝에 찾아온 기쁘지 않은 소식을 잘 타고 넘어가기를. 그 자리를 꾹꾹 밟아 잘 다져 다음 목적지로 가는 발판을 만들기를. 열심히 연습했던 자신의 태도를 믿고 새로운 삶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기를.
그러니까 난 기다리고 있지만 기다리고 있지 않기로 한다.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고, 이 글, 저 글을 써보며 충실하게 이 시간을 보내면 된다. 관건은 공모전 당선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 시간에 충실했느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