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가을 야구할 때 우린 내년 가을 야구를 준비한다
야구 시즌 종료 후 각 구단에서 그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진행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을 마지막으로 두 달간은 정식 훈련이 없다. 마무리 캠프는 모든 선수가 필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보통 신입 선수나 유망주, 자원하는 선임 선수들이 참여한다. 시즌을 시작하는 훈련은 스프링 캠프라고 한다.
올해도 가을 야구에 가지 못해 남의 집 잔치가 치러지고 있다. 정규 시즌이 끝날 즈음, 롯데 자이언츠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 시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선수들에게 묻는 영상이 올라왔다. 선수들은 ‘첫 안타 쳤을 때, 끝내기 홈런 쳤을 때, 오늘, 지금 이 순간’ 등 여러 이야기를 했다. 좋았던 순간에 대한 언급도 많았지만, 아쉽다는 선수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내 한 해를 돌아보았다.
올해 내가 가장 잘 한 건 뭘까. 순식간에 떠올랐다. 바로 테니스를 그만둔 것이다. 2년 동안 테니스를 배웠다. 없는 운동신경에 정형외과에 다니면서 꾸준히 했더랬다. 그만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아냐, 할 수 있어. 힘내.’하고 다그치며 끌고 왔다. 그러나 연습할 코트를 빌리기도 어렵고 같이 쳐 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일주일에 20분씩 두 번의 레슨만으로는 실력이 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테니스를 치려고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남편은 실력이 부쩍 늘어 내 실력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나와 상대해 줄 파트너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나는 클럽에 가입할 용기도 없다. 그런데 그만두는 것도 힘들다. ‘포기’란 말이 싫어 꾸역꾸역 한다. 열심히 하지 않을 거면 그만둬야 한다. 생각해 보니 기구 필라테스도 수영도 내가 먼저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았는데 2년 가까이하던 기구 필라테스는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뒀고 1:1로 하던 수영 강습은 선생님이 먼저 그만 가르치겠다고 하셔서 그만 두었다.
아니다 싶을 때 그만두는 것 또한 용기다. 어떨 때는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중간에 꺾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드디어 난 테니스를 그만 둘 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잘한 일이다.
올해 가장 아쉬운 건 글을 많이 쓰지 못한 것이다. 돈 버는 일을 먼저 하다 보니 회사에 다닐 때만큼이나 글 쓸 시간이 없다. 글을 규칙적으로 쓰지 않으니 글이 더 안 써지고 글이 안 써지니 자괴감에 빠지고 ‘아, 내가 이러려고...’로 시작되는 불평불만 레퍼토리만 쌓여간다.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정규 야구 시즌이 끝난 것이지 한 해가 다 지난 것은 아니다. 올해 가을 야구를 가지 못한 롯데 자이언츠는 오히려 발 빠르게 다음 해를 준비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공식 유튜브에는 감독과 코치들이 선수들과 함께 하는 훈련 영상이 올라온다. 우리는 벌써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멋진!
예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있냐 물으니 그냥 했단다. 그럴 리가 없다. 조금 더 캐물으니 조심스럽게 말한다.
“지금까지 연락 안 왔으면 안 됐겠지? 기대했었는데.”
며칠 뒤가 모 출판사 어린이책 공모전 발표일이다. 나도, 후배도 이 공모전에 원고를 보냈다.
“당선된 사람에게는 한 주 전에는 연락 줬겠지?”
“2주 전에 줬을지도 몰라.”
응모하고 떨어지는 게 일상이라지만, 떨어지면 언제나 아쉽다. 그러나 많이 아쉬워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예전처럼 연연하지 않는다. 공모전 결과에 덜 연연하는 방법은 내 경우엔 계속 다른 공모전에 응모하는 거다. 당선자 발표가 날 즈음에도 다른 공모전 글을 쓰고 있으니 아무래도 정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얘, 나 지금 다른 공모전 원고 기획해야 하거든. 끊어. 너도 전화 끊고 얼른 원고 써.”
후배의 전화를 끊었다. 공모전 응모 7년 차, 이런 노하우도 알게 되다니. 장하다. 올해 가을 야구에 연연하지 않고, 얼른 모드 전환을 해서 내년 가을야구를 위해 노력하는 롯데자이언츠 같다. 아하하하.
할 수 있을 만큼의 최선을 다 하고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는 마음을 내려놓자. 난 땅볼을 쳤는데 운이 좋아 상대팀의 실책으로 출루하기도 하고, 잘 맞은 타구가 운이 나빠 상대팀 수비수 정면으로 가기도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이 작용한다.
‘운’에 대해 말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종목에 참여한 튀르키예의 ‘푸르칸 아카르’ 선수다. 준준결승에서 5명이 트랙을 돌고 있는데 결승선을 몇 미터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선두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그 결과 1, 2, 3등이 모두 넘어져 트랙 밖으로 밀려나고 경기 내내 맨 뒤에 있던 튀르키예 선수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심지어 앞서 들어온 선수가 실격되면서 푸르칸 아카르 선수는 맨 뒤에서 자기 속도로 스케이트를 탔을 뿐인데 조 순위 1위의 성적으로 준결승에 진출한다. 사실 그전에 있던 예선전에서도 앞 선수가 넘어지는 바람에 조 2위로 통과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지면서 그는 ‘럭키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전년도인 2021년에 푸르칸 아카르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 1000m에서 38위를 기록했다. 사실상 예선에서 떨어지는 게 당연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2022년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부문에 출전해 최종 순위 6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1000m 쇼트트랙 준준결승 장면을 다시 보고 싶어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있다, 있어. 어부지리로 조 1위를 한 튀르키예 선수의 표정이 너무 밝아 웃음이 났다.
결과는 당사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른 선수들이 열심히 안 했다고도, 푸르칸 아카르 선수가 더 열심히 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생각하며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자. 결과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자연스레 겸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정규시즌이 끝나고 일 년이 다 끝난 느낌이었는데 롯데자이언츠 훈련 영상을 보며 나도 덩달아 다시 힘을 낸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후회하지 않도록 그날 아쉬울 법한 일을 지금 하기로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글쓰기 강좌를 살펴보았다. 마음에 드는 강좌를 클릭하자마자 드는 생각은,
글쓰기 강좌들이 비싸구나... 글을 써서 돈을 벌면 글쓰기 강좌를 맘껏 신청할 텐데 글을 써서 돈을 벌지 못해 글쓰기 강좌 신청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
사실 마사지 기계를 사고 싶어 모아 둔 돈이 있긴 하다. 그래, 지금은 글을 쓸 때지. 굳게 마음을 먹고 강좌를 신청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옆에서 자이언츠 유튜브를 보며 내년 야구 시즌을 말하는 딸에게 올해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쉬운 점을 말하면, 그 아쉬운 점을 만회할 2개월이 남아있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잔소리 장전, 발사 준비.
“아쉬운 점? 없는데? 난 아주 만족하는데?”
역시.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첨언
티르키에의 푸르칸 아키르 선수는 2022년 동계올림픽 이후, 2023년 유럽 선수권 대회 쇼트트랙 1000m 종목에서 ‘동메달’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튀르키예 쇼트트랙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 국제 대회 메달을 획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