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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6. 2024

우천 경기 중단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우천 경기 중단: 

경기가 진행 중에 비가 내려 더 이상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경기 중단을 선언한다. 이후 추이를 지켜보면서 경기 재개 혹은 경기 최종 종료 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때, 경기 중단의 권한은 당일 경기를 담당하는 심판진에게 있다. 심판진은 경기장 운영진의 의견과 양 팀 감독의 의견을 참고해 최종 경기 중단 결정을 내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 경시대회를 봤는데 아주 어려웠다. 자신 있게 써낸 답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경시대회 문제는 항상 어려웠고 난 수학을 못 했으니까. 이건 성적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니 조금 못 봐도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경시대회 다음 날,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채점한 경시대회 시험지를 교탁 위로 툭 던졌다.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다. 선생님은 교탁 위 시험지를 휙휙 넘기더니 한숨을 푹 쉰다.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칠판 바로 밑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겉옷의 소매를 걷어붙인다. 아이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설마……설마…… 우릴 때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선생님은 칠판 옆에 세워져 있던 몽둥이를 들었다.

“이 녀석들! 이것도 점수라고! 90점 이하는 한 개 틀린 데 한 대씩 맞는다. 이제부터 이름 부르면 나와!”

긴장이 되어 손끝이 저렸다. 

‘아닐 거야. 그냥 겁만 주려고 그러시는 거겠지.’

선생님은 내 생각과 상관없이 맨 위에 있는 시험지에 적힌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 불린 아이는 겁에 질려 앞으로 나온다. 

“바지 걷고 의자 위로 올라가. 손은 칠판에 대고!”

100여 개의 눈이 한 아이의 종아리로 향했다. 휙, 턱. 몽둥이가 움직인다.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다. 눈을 감아도 소리는 들린다. 턱. 턱. 턱. 턱. 선생님이 “들어가.”라고 하니 아이는 팔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로 돌아와 엎드렸다. 와, 이건 현실이다. 곧 나에게 닥칠 현실. 선생님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몇 개 틀렸는지라도 알면 이렇게 떨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한 명씩 계속 불려 나가고 다섯 대 이하로 맞는 아이가 거의 없다. 난 차가워진 손을 계속 주무르며 내가 맞을 순서를 기다렸다.      



열 명쯤 맞았을까. 내가 짝사랑하던 민모 군의 이름이 불렸다. 민모 군은 2개를 틀려서 92점. 그때까지 이름 불린 아이 중 최초로 맞지 않고 시험지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행이라는 듯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부럽다’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민모 군에게 창피하지 않게 너무 많이 맞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다음은 우리 반 반장 순서. 반장이 공부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열 대가 넘게 맞는다. 턱, 턱, 턱. 하는 매 소리와 아, 아, 아아. 하는 반장의 신음 소리가 쿵짝쿵짝 공포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다 반장은 ‘아악’하고 큰 신음을 내뱉고 쭈그려 앉아 양손으로 종아리를 문질렀다. 

“너, 그러다가 손가락까지 부러지고 싶어?”

선생님은 동그랗게 말린 반장의 등을 몽둥이로 쿡쿡 찌르며 제대로 서라는 표현을 했다. 5학년 중에서 가장 등치가 좋은 반장이 조그맣게 변했다. 맞는 반장만큼은 아니겠지만 보는 우리도 괴로웠다. 제발, 제발. 그만 때리세요. 그 뒤로도 턱. 턱. 턱. 

“들어가.”

열여섯 대를 맞은 반장은 절뚝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휴. 내 한숨의 농도가 점점 짙어진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나갔다가 들어왔고,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난 의자를 삐거덕 뒤로 밀고 일어나서 다시 의자를 삐거덕 자리에 넣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양손을 차가운 칠판에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터덩텅. 

심상치 않은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몽둥이를 벽 쪽으로 던지고 밖으로 나가셨다.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왜 나가셨는지, 매타작은 끝난 건지 알 수가 없다. 가장 당황스러운 건 나다. 나는 계속 의자 위에 있어야 하나, 의자 아래로 내려가야 하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난 의자 위에 선채로 고개만 살짝 돌려 선생님 교탁 위에 있는 내 시험지를 봤다. 와 씨, 17개를 틀렸다. 25문제 중에서 17개를 틀리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돌아왔고, 나에게 시험지를 가지고 들어가라고 했다. 내 뒤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맞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만 편애한다면서 질투하고 수군거렸다. 네 덕분에 안 맞았다며 고맙다고 비아냥대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난 선생님이 날 편애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어쩌면 열일곱 대를 때릴 생각을 하니 팔이 무진장 아플 것 같아 매를 던졌을 수도 있고 바들바들 떠는, 곧 열일곱 대를 맞게 될 마른 여자아이가 불쌍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건 나의 추측이다. 내 순서에서 매질을 멈춘 선생님만의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가끔은 상상한다. 내가 떨고 있을 그때, 천사가 선생님의 매를 딱! 잡는 상상. 매를 쥔 선생님의 팔에 힘이 빠진다. 선생님은 흥분이 가라앉고 정신이 든다. ‘어머,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상상만으로도 든든하고 배가 부르다. 어쩌면 그때 내가 내 인생에 쓸 운을 다 끌어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혹시, 여러분도 인생에서 이런 기적 같은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 만약 아직 없다면, 그렇다면 기대하시라. 언제고 한 번은 찾아올 테니. 아, 내 남은 인생에 그런 행운이 또 있으려나. 누군가는 인생에 세 번 있다던데.     



서울에는 비가 계속 왔다. 야구가 우천 취소될 줄 알았는데 지방은 괜찮은지 롯데와 기아의 경기가 진행됐다. 경기 시작부터 조금씩 비는 내리고 있었는데 점점 빗줄기가 거세진다. 선수들은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경기를 한다.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롯데는 3회에서 3점을 냈다. 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많이 오는데도 경기는 계속된다. 선수들은 그 와중에도 열심히 치고 달리고 잡는다. 힘들어 보인다. 내 주변에는 감기와 알레르기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선수들은 비를 저렇게 맞고도 괜찮은 걸까. 결국 6회 말에 경기는 중단됐다. 스코어는 3: 1.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결국 밤 10시쯤에 경기는 그대로 끝나는 걸로 결정됐다. 롯데의 승리. 끝날 줄 몰랐는데 끝났다. 오, 럭키다! 이 경기로 롯데는 3연패에서 탈출했다. 

(23. 9. 18일 경기)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는 거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와하하 웃는 일이. ‘어머, 끝났어? 와, 대박’하는 일이.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아주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까. 야구는 시즌에 한 번, 우리는 인생에 세 번 정도? 에잇, 뭐, 기분이다, 믿거나 말거나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한 자릿수 숫자를 넣어보자. 그렇다면 나는 인생에 아홉 번 정도? 아직 여덟 번이나 남았군. 으흐흐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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