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프 Oct 14. 2024

도루

룰 안에서 용인되는 훔치기와 속이기 

*도루(盜壘, steal): 

한자 그대로 베이스(루)를 훔친다는 뜻이다. 처음 야구를 봤을 때 가장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바로 도루였다. 타자가 공을 치지도 않는데 왜 뛰지? 도루는 베이스에 있는 주자가 수비팀의 허점을 이용해 공과 상관없이 다음 베이스로 가는 것이다. 야구 기록에는 도루(Stolen bases)를 약자로 ‘SB’라 표시한다. 주자가 도루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빠른 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잘 달린다고 해서 모두 도루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도루를 잘하려면, 센스, 스타트, 스피드, 슬라이딩의 4S가 필요하다. (위키백과, 야구 대백과 참고)     



24년 여름, 너무 덥다. 날씨 때문인지 롯데도 부진하다. 도루를 잘하고 공격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던 선수들이 아웃을 당한다. 도루하다 견제를 당해 주자가 사라진다. 소극적이면 소극적 인대로 공격적이면 공격적 인대로 점수가 나지 않는다.      



24년도 롯데의 문제는 투수다. 외국인 투수를 제외하고는 투수 대부분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날도 선발 투수가 2이닝인가 3이닝을 던지고는 마운드를 내려갔다. ‘오늘 경기도 보나 마나 뻔하군.’ 하고 한숨을 쉬었는데 그다음 올라온 투수가 생각 외로 잘해준다. 사실 올해 막 프로에 온 선수라 ‘지금 왜 이 친구를 올리지?’하고 불만이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집안일을 하며 야구를 보다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투수의 투구폼을 설명하는 해설 위원의 말 중 ‘디셉션’이란 용어가 들린다. 잘 몰라 찾아보니 디셉션(Deception)은 투수가 투구 동작 중 공을 잘 숨겨 타자가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하는 테크닉을 말한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정말 투수의 왼손이 머리 뒤로 숨었다가 나온다. 공이 언제 나올지 타자가 알기 어려울 것 같다.      



웃음이 났다. 야구 진짜 멋지잖아. 도루를 하며 베이스를 훔치고 투구폼으로 공을 안 보이게 속이고 정말 난리 났잖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가. 떨려도 안 떨리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안 그러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될 때가 있지 않은가.      



 대학에서 아동 심리학을 배울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이 어린이의 거짓말에 관한 것이었다. 난 내가 어릴 때 왜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했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수업에서는 나의 기대와 달리 거짓말에 대해 거의 다뤄지지 않았고 난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어릴 적 내 거짓말 몇 개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수영을 배웠는데 운동신경이 없는 나는 상급반으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닌 지 3개월이 지났는데 물에만 겨우 떴다. 난 엄마에게 혼날까 봐 자유형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엄마가 다음 달부터는 동생과 함께 수영을 다니라고 하셨다. 큰일이다. 동생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동생과 함께 수영장에 간 첫날, 난 수영장에 일부러 시계를 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운동을 할 때,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쿠, 이거 방수가 안 되는 시계인데, 내가 시계를 차고 들어왔네!” 난 시계를 빼고 오겠다며 수영장 밖으로 나갔고 그대로 샤워를 하고 아예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다음 날에는 동생에게 샤워를 좀 더 하고 수영장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동생이 들어가고 조금 지난 후 샤워를 마치고 또 밖으로 나왔다. 어떤 날은 동생 눈치를 보며 상급반에서 수영을 조금 하다가-상급반도 처음에는 킷판을 잡고 발차기로 몸을 풀기 때문에 따라 할 수 있었다- 중간에 나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동생과 함께 있어 준답시고 초급반에서 수영을 하다가 중간에 나가기도 했다. 그 한 달 동안 난 자연스럽게 수영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수영 강습이 끝나고(물론 난 받지 않았지만) 가뿐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수영장 버스 안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날 가리키며 말했다. 
 “얘, 진짜 신기한 애야.”
 나는 그 오빠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얘 수영 엄청 잘해. 초급반부터 상급반까지 모든 반을 돌아다니면서 수영을 한다니까!”
 휴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초등학교 5학년 봄 소풍 전 주, 나랑 친한 두 친구는 함께 모여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하기로 했다. 우리는 MBC 창작 동요집을 뒤적이며 함께 부를 노래를 찾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뻐기듯이 말했다. 
 “사실 나 MBC 합창단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다른 한 친구가 눈을 크게 뜨고 그 친구를 대단하다는 듯 쳐다봤다. 난 이야기했다. 
 “나는 MBC 합창단이야.” 



 그다음 날 학교에 가니, 이미 소문이 쫙 퍼져있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몰려와서 “너 MBC 합창단이라면서?”라며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연습은 얼마나 자주 하는지, 연습은 어디서 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지,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난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 방송국 안의 강당 같은 곳에서 연습한다고 했다. 그리고 MBC 합창단은 인원이 많아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나누어서 출연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나에게 넌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냐고 물었다. 그때 <야 일요일이다!>라는 일요일 아침에 방송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난 거기에만 출연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MBC 합창단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이야기를 믿는 아이들보다 안 믿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 당시 내 동생은 자주 우리 반에 오곤 했다. 친구들이 내 동생에게 물어볼 것이 뻔해 난 집에 가자마자 어리숙한 동생을 붙잡고 말했다. 
 “그때, 삼촌이랑 너랑 나랑 MBC 방송국에 갔었던 거 생각나지?” 
 “어? 언제?” 
 “어머, 기억 안 나? 그때 삼촌이랑 같이 갔었잖아. 언니 합창단 시험 본다고.” 
 한참을 얘기했더니 동생은 “아. 맞다. 그랬지.”라고 말했다. 내 예상대로 친구들은 내 동생에게 내가 MBC 합창단이 맞는지 물어보았고 동생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다 잊은 듯싶다가도 갑작스럽게 묻곤 했다. 언제 텔레비전에 나오냐고. 요즘도 노래 연습을 하냐고. 그럴 때마다 난 심장이 쿵쿵 뛰었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거짓말을 지어냈다. 정말 곤혹스러웠다. “하하, 사실 뻥이었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어느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갔는데 내가 반에 들어서자마자 '고인돌'이란 별명의 남학생이 날 보고 말했다. 
 “나 어제 <야, 일요일이다>에서 너 봤어. 너 텔레비전에서는 이가 엄청 하얗게 나오더라!”
 어머나. 이렇게 고마울 때가. 난 그랬냐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텔레비전에서 날 봤다는 아이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거짓말은 언젠가는 탄로 나는 법.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 우리 아래 집에 살던 친구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며 친구들 몇을 초대했고 내 동생도 그 자리에 왔다. 재밌게 놀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내 동생에게 “야, 너네 언니 MBC 합창단 아니지?”하고 물었다. 정말 뜬금없었다. 아, 오기 전에 동생 입단속을 시켰어야 했는데. 이후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난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고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언니는 MBC 합창단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아직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문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맘 졸이던 내가 생생하다. 



 내 거짓말 레퍼토리를 들은 대학 친구는 그저 깔깔 웃기만 했다. 그 후 몇 년 지나 애니어그램이라는 성격 유형 테스트를 한 후에 알게 된 것이, 난 날 포장하기 좋아하는 유형이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서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유형. 그 뒤로 내 삶의 모토는 '정직하고 투명한 삶'이 되었다. 



작년에 쓴 일기에 거짓말에 대한 내용이 있어 덧붙인다. 

요즘 아이와 함께 읽는 책은 네덜란드 작가가 지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 2- 그래도 인생은 즐겁다>이다. 주인공인 폴레케가 안쓰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빠가 마약 중독자이고, 엄마는 담임 선생님과 연애를 한다. 물론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을 했다) 주인공의 엉뚱한 생각과 재치 있는 말에 자꾸 웃음이 터진다. 



어제는 폴레케의 아빠가 폴레케가 잠깐 방에 들어간 사이 부엌에 있던 돈이 든 유리병을 훔쳐가는 장면을 읽었다. 폴레케는 자신이 훔쳤다고 거짓말하고 엄마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눈치챈다. 폴레케에게 왜 아빠가 가져갔는데 거짓말을 하냐며 몰아세운다.      



“나는 누구한테 거짓말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화가 났다. 특히 내가 정말로 거짓말을 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난 그저 재미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꼬집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p56)”     

폴레케의 거짓말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감싸주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 부분을 읽고 아이와 함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짓말이 항상 나쁜 것일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악일까.      



“난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을 위한 거짓말도 있잖아. 다 진짜만 말하면 세상은 엉망이 될걸? 내가 엄마 음식 맛없다고 하고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하면 안 되잖아.” 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내 눈치를 살짝 살핀다. 

“그래서 거짓말이 좋다는 거야?”

“아니, 배려의 거짓말 정도는 괜찮은데, 나 자신이 거짓이 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거짓 덩어리가 되면 안 된다는 거야.”

평소의 딸 같지 않은 말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기를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내 잘못을 덮기 위해 남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내가 거짓이 되는 것, 나 스스로 거짓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건 피하자. 야구에서도 모든 속임수가 용납되는 건 아니다. 룰이 있고 상대 팀에 대한 예의가 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심판도 4명이나 있다.      



인생에서도 자신만의 룰이 필요하다. 룰에서 벗어난 거짓이 날 유혹하는 순간에는 심판을 생각하자. 내 앞에 보호대를 쓰고 심판을 보는 딸이 나에게 묻는다. 

“설마 지금 거짓 덩어리가 되려는 거야?” 

아후, 눈매가 아주 매섭다.                     

이전 13화 KBO 올스타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