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환 Sep 13. 2021

#6. 검찰의 정치성

 검찰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이 요구되는 조직이다. 부패하기 쉬운 권력을 견제하는 것은 검찰의 존재 의미 중 하나다. 권력의 통치기구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찰은 권력 수사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력 수준도 검찰보다 떨어진다. 우리 검찰 제도는 일제 강점기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검찰에게 직접 수사권을 주고, 유력자들은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검찰이 정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사건을 다룬 것은 역사가 깊다. 유력자들에 대한 수사는 정치적 유·불리를 낳게 된다. 검찰 수사가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일본에서는 1909년부터 검벌(檢閥)이라고 불렸던 검찰 권력이 정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1909년 대일본제당주식회사(약칭 닛토) 의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실을 검찰이 수사한다. 일본 검찰은 내각의 간섭 없이 처음으로 자체 수사팀을 구성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한다. 1914년에는 해군 장교들이 독일 시멘스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을 감찰이 수사해 야마모토 곤베 내각이 붕괴됐다. 1915년에는 내무대신 오우라 가테타게의 선거간섭, 의원매수, 독직 혐의를 검찰이 적발했는데 사법대신이 오우라에 대한 불기소 처분을 지시하자, 검찰은 공직사퇴와 정계은퇴라는 정치적 결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검사총장이 독자적인 수사진을 구성하고 정치적 해결도 도모한 것이다. 검벌 세력의 탄생이었다. 검찰의 위상은 강화됐고, 검찰은 검찰권 독립도 요구하게 됐다. 검벌은 관료벌, 군벌, 정당세력과 나란히 제4의 정치세력이 됐다고 한다. 검찰 세력이 성장하면서 일본에서는 검사가 판사보다 우위에 있는 ‘검존판비(檢尊判卑)’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의 검찰 제도는 해방 후 한국의 검찰 제도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검찰은 본래 사법부와 수사기관의 중간쯤 되는 기관으로 태어났다. 수사기관의 성격보다는 소추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경찰이 수사를 해오면 공익의 대변자로서 그것을 한 번 더 검토하고 인권 침해가 없는지 살펴보는 성격의 기관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그 성격이 좀 변질됐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고문과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군과 경찰을 국회의원들이 신뢰하지 못했고, 검찰을 수사기관화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전신인 중앙수사국이 미국의 연방수사국을 본떠서 설계됐는데, 미국과 달리 이를 대검 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검찰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정치적 성격의 수사를 했다. 검찰은 1949년 임영신 상공부 장관 독직 사건을 수사했다. 검찰은 수사를 막으려 했던 법무부 장관에 굴하지 않고 수사를 해서  임영신 장관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임영신 장관은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최초의 여성장관이자 이승만 정부 실력자였던 임영신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술책이 있었고, 검찰이 이용됐다는 해석도 있다. 검찰은 비슷한 시기 조봉암 농림부 장관 독직 사건도 수사했다. 역시 법원의 판단은 무죄였다. 이승만 정부 내 진보 진영 인사의 상징이었던 조봉암도 정치 게임에 의해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는 해석이 있다.     

 검찰은 해방 후 초기 자신들의 독립성을 가졌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통제를 강화하면서 점차 권력의 하부기관이 되고 만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이후에는 검찰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고 군과 정보기관에 압도적으로 밀리게 된다. 1963년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에 올랐다 법무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간 신직수 씨의 사례는 군사정권 시절 검찰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검찰도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여러 사건의 조력자로 존재하게 된다.     

 검찰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다른 권력기관들은 점점 위상이 낮아진 반면 검찰은 날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검찰, 해방 직후 검찰처럼 정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 힘을 키우면서 일종의 정치권력이 됐다. 검찰은 수사를 선택할 수 있었고, 처벌 대상자도 선택할 수 있었다. 권력이 힘이 셀 때는 권력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이행했다. 힘이 약할 때는 정권에 결정타를 날리고 레임덕을 불러오거나 가속화시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만 해도 정권은 검찰권을 통치권의 하나로 생각해 수사에 개입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PD수첩 명예훼손 사건, 정연주 KBS 사장 배임 사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사건 등은 정부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수사라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PD수첩 사건은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 부적절한 수사 지휘가 있었다고 인정한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을 모욕한 일본인 기자를 기소하라고 청와대에서 검찰에 압박을 가했다. 포스코, KT, KT&G 등 과거 공기업이었던 기업들의 수사와 자원외교 관련 공기업 수사는 역시 정권 하명수사 성격이 컸다. 반대로 정권에 결정타를 가하는 역할도 했다. 정권의 힘이 빠지면 검찰이 정권의 핵심들을 수사해 레임덕을 확인시켜줬다. 김영삼 정부 이후로 이러한 모습은 반복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차남 현철 씨가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도 검찰 수사를 받고 비리 혐의가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도 말기 권력 순위 넘버 원, 넘버 투로 불렸던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구속을 지켜봐야 했다. 박근혜 정부 인사들은 언론의 폭로로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 검찰에게 희망을 건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수남 검찰총장 등 검찰 고위직들은 자신을 임명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냉정한 수사 결과를 내놨다. 그 단계에서 정권 편을 들면 검찰의 존립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특검팀이 출발하기 전 이미 검찰은 정권이 끝났다는 최종 선고를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을 키우던 검찰에 처음으로 견제구를 날린 정권은 노무현 정부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른바 '옷로비 사건‘ 등으로 검찰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정치적 편향성 등이 크게 문제가 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특검이 몇 차례 도입됐고, 이를 상설화한 개념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2003년 대선자금 수사 이후 검찰개혁 동력이 떨어졌다.

 그런데 대선자금 수사의 동기가 불순하다. 검찰 내부에서는 당시 검사와의 대화 등을 통해 검찰 조직이 개혁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에 상당한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검사들을 가장 화나게 한 것 중 하나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이상수 새천년민주당 의원의 ‘단두대’ 발언이었다고 한다. 변호사 출신인 이 의원은 노무현 캠프에서 자금 관리를 담당했던 총무본부장을 맡았고, 새천년민주당에서 역시 돈줄을 쥐고 있는 사무총장을 하고 있었다. 이 의원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2003년 3월 단두대 발언을 한다. 이 의원은 “프랑스 혁명 때 반대파를 단두대로 처형해 맹위를 떨쳤던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말기에 처형할 명단을 발표하려다 좀 늦춘 일이 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심지어 처형 대상이 아닌 중도파도 긴장했고 결국 중도파가 거꾸로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고 말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저항에도 소신대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검찰은 강 장관 임명에 충격을 받았고, 검찰 인사의 원칙이었던 기수 관행을 파괴하면서 고위직 인사들의 줄사표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상수 의원의 발언에 대해 분노하는 분위기였고 이 의원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검찰의 정치가 시작됐다. 검찰은 2003년 3월 SK그룹 분식회계 사태로 구속돼 있던 관계자들을 조사실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대선 정치자금 문제를 캐기 시작했다. SK그룹 관계자들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것이 대선자금 수사의 시작이었다. SK그룹 관계자들은 “정치인들이 와서 삼성, LG 등 다른 기업으로부터 얼마씩 받았으니 당신들은 이만큼 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다른 기업들도 검찰에 줄줄이 불려 왔다. 검찰은 당시 대선자금 진술을 해 준 SK그룹 관계자들의 분식회계 혐의 액수를 줄여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는 대성공이었다. 정치권의 부패를 단호하게 처리한 검찰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이 수사팀에 포함돼 있었다. 한동훈 검사 등 윤 전 총장과 가까운 검사들 가운데 일부도 이 수사팀에 들어가 있었다. 윤 전 총장은 2021년 3월 사퇴 직전 공개된 언론 인터뷰에서 “2003년 대선자금 수사단에 있을 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행위를 처음으로 처벌했다”며 “수사 이후 정치자금법의 정치자금 부정수수죄의 처벌 조항이 3년 이하에서 5년 이하로 고쳐졌다”고 언급했다. 대선자금 수사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할 정도로 이 수사팀에 참여한 것을 자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수사의 시작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

 대선자금 수사로 국민검사가 된 안대희 중수부장은 검찰총장이 유력했지만, 2005년 총장 경쟁에서 밀리고 만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대선자금 수사를 이끈 그를 청와대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 안대희 전 중수부장은 대법관 6년을 거쳐 정치권으로 진출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영입했다. 임명된 직책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그는 국회의원 한 번 해 보지 못했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거물 정치인이 됐다. 2014년 5월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변호사 시절 수임료 의혹 등으로 자진사퇴하고,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최고위원을 맡는다. 그는 서울 마포갑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과 함께 그의 이름도 정치권에 잊혀져 갔다.

 안대희 전 대법관과 함께 2012년 8월 새누리당으로 같이 향한 사람이 있었다. 검찰의 대표적인 ‘칼잡이’로 알려졌던 남기춘 전 서부지검장이었다. 남 전 지검장은 안 전 대법관이 가장 아끼던 검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대검 중수부장과 중수1과장을 맡아 수사를 이끌었다. 남 전 지검장은 검찰 내외에서 알아주는 강골 검사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였다. 서부지검장 재직 시절 한화그룹 비자금을 수사하면서 5개월 동안 한화그룹 임직원 등 300며 명을 조사하고, 계열사 20여 개 사를 압수수색했다. 언론에서 과잉 수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김승연 회장은 이러한 비판에 힘입어 여러 차례 자신을 소환하는 검찰을 향해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요 관계자들의 영장이 기각되자 새로운 관계사를 압수수색하고 새로운 인물을 소환 조사하기도 했다. 8년이 지난 뒤 서울중앙지검이 펼치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을 연상케 한다. 김승연 회장은불구속 기소되지만, 1심 재판으로 법정구속된다. 남 전 지검장의 뚝심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남 전 지검장은 대선 자금 수사 당시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의 구속을 주장하다 윗선과 충돌을 빚자 사표도 불사했다고 한다.     

 여담을 하나 한다면 안대희 전 대법관과 함께 새누리당 정치쇄신위원회에 들어간 남기춘 전 지검장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2012년 대선을 두 달 여 앞두고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이 주최한 오찬에 동석했다 기자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발언을 한 것이다. 남기춘 정치쇄신위원은 당시 논란이 됐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총이 있으면 옛날처럼 다시 뺏어오면 되는데”라고 농담 발언을 하고, 정수장학회 언론사 지분을 매각 문제에 대해서는 “그걸 팔아서 안철수재단에 기부하면 안 되나”라고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했다. 당시 대선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유력한 대항마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기춘 위원은 오찬에서 여성 기자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한 살이라도 젊은 남자가 따라주는 게 맛있겠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대표 특수통 검사들의 인식과 수준을 드러내는 단면이었다. 과거 검찰에는 티타임이라는 독특한 자리가 있었다. 검찰 고위 간부들이 출입기자 몇 명을 불러서 차를 마시면서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던 자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가 점점 공식화됐고, 기자들과 공보 담당이었던 차장검사와의 정기 간담회 자리로 변형됐다. 어느 순간 티타임에 차는 나오지 않았고, 사건 브리핑과 같은 질의와 응답의 장으로 변했다. 카메라는 없기 때문에 농담성 발언은 오가고, 가시 돋친 말도 주고받는다. 남기춘 전 지검장이 특수통으로 이름을 날릴 때 티타임 등에서 저런 식으로 말하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기자 사회에서는 검찰 출입 기자가 출입처에 나가면 가장 ‘을’이라는 말이 있었다. 특종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검찰 관계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출입처처럼 ‘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 전 지검장은 검찰에서보다 기자가 훨씬 우대받는 정치권에 와서도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해당 오찬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불쾌함을 느낀 것을 그대로 기사로 옮겼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는 특수통 검사는 몸에 밴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 정치를 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주 설화(說禍)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검·언유착 사건’으로 명명된 한동훈 검사장와 채널A 기자 간의 대화도 과거 티타임이나 기자와 검찰 관계자의 통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그 대화가 고스란히 녹음됐고, 세상에 알려지니 문제가 됐다. 그 대화를 범죄 모의로 생각하고, 처벌까지 거론하는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 외부인들로 구성된 수사심의위원회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 정도만을 한 한 검사가 범죄 행위를 했다고는 판단하지 않았다.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수사심의위가 면밀하게 검토해 판단했을 것이고, 이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특수통들의 말하기 방식이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 23화 #5. 정치검찰의 종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