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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 Apr 24. 2020

큰 꿈을 품은 그대, 더이상 작지 않은 사람

EPILOGUE

얼마 전 종영한 tvN 오디션 프로그램 <더블캐스팅>을 보면서 귀에 딱 꽂히는 한 마디가 있었다. 

tvN, <더블캐스팅> 中
‘You’re not small’ 

당신은 결코 작지 않다고. 아주 큰 사람이라며 참가자를 다독여주는 그 말이 꿈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 같았다. '그래, 아무도 내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을 땐 그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절실하고 고맙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득 내 지난날이 떠올랐다. 마음속에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과 열정이 들끓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져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 절하했던 그때. 세상에, 그게 벌써 거의 십 년 전이라니.      


고등학교 1학년 음악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3분짜리 영상 하나를 틀어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올해 이 작품 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또렷한 음성, 저화질의 블로그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그리고 강렬한 멜로디의 음악까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완벽한 공연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이 벅차고 쿵쾅거리는 기분. 그 넘버는 조승우 씨가 부른 <지킬앤하이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오디컴퍼니, <지킬앤하이드> 中
여기까지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뮤덕’ 혹은 ‘뮤지컬 지망생’의 스토리다. 

흔한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으레 찾아볼 수 있는. 느닷없이 첫사랑 같은 꿈이 가슴 속을 파고든 순간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고군분투한 과정, 그 레파토리가 친숙하면서도 지겨운 이유는 그들의 성공 신화가 크게 공감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그들과 달리, 난 꿈을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삶을 살고 있다. 

요즘도 뮤지컬 넘버를 흥얼거리면 주변에서 혀를 끌끌 차곤 한다. ‘지겹다 다른 노래 좀 부르면 안 돼?’ 버퍼링이 걸린 기계처럼 안 되는 고음 부분만 구간 반복을 해대니 그럴 만도 하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오기로 노래와 싸우는 느낌이랄까. 어쩌다 한 번씩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틀어놓을 때면 엄마 아빠가 ‘그 노래가 그 노래였어?’ 하고 디스전도 벌인다. 하지만 절대 굴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하고 완성형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에둘러서 좋게 표현하자면, 나는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는 거다.      


그런 꿈 많던 나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던 때가 있었다. 

한창 수험생활에 열을 올리던 고3 시절, 엄마 친구 아들이 뮤지컬 영재로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냥 찬송가 불렀는데 뽑혔대 노래는 그런 애가 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혀서 서러워 엉엉 울었다. 난 이대로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못하고 공부만 하다 늙어 죽는 건가 싶어서. 남들이 말하는 엄친아/딸과 비교당하는 기분이 이렇게 비참한 거구나 싶었다.

<Fame the Musical>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우려와 달리 무대에 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대학교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FAME> 원어 공연을 올리면서 피부로 느낀 공연의 맛은 상상하던 것과 꽤나 달랐다.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고,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하는 기쁨도 물론 있지만, 다함께 무대를 만들기 위해 호흡하는 과정과, 극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텔링 자체에도 엄청난 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을 앞둔 날 대기실에서 Overture 곡을 흥얼거리는데, 친구로부터 들은 한 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그토록 목말라 있던 그 말, ‘Hey girl, you gotta sing!’   


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떳떳하다. 젊은 날의 도전이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도약을 시작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나를 기대할 수 있어서. 돌이켜 보면 내 안의 결핍과 질투, 시기와 같은 감정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줬고. 뜻하지 않게 이끌려온 길들이 예상치 못한 행운과 기회들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글 쓰는 재주로 잡지사와 연이 닿기도 했고 방송국에 입성했으며, 공연을 하며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도전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You’re not small’ 

사소한 칭찬 한 마디는 포기의 절벽 앞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구원할 생명줄이 되기도 한다. 또 새로운 꿈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도 품게 해준다. 그래서 오늘을 사느라 뜨거웠던 열정을 뒤로 하게 된 성실한 현실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큰 꿈을 품은 그대, 더 이상 작지 않은 사람’이라고. 

화려하고 순수했던 꿈 너의 두 손에 넘쳐흘렀던
그 한 움큼은 꼭 쥐고 살아가길

- AKMU, 그때 그 아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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