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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an 13. 2024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야. 아빠!

세상에 '너무'해도 괜찮은 것이 있기나 할까?

너무

 -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


'너무.' 정상 범위를 넘어서 지나치게 치우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너무'라는 말 자체에는 이미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너무' 뒤에 부정적인 말이 나오면 말할 것도 없고, 긍정적인 말이 나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말이든지 '너무'와 만나면 경고나 위협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치우치지 말아야 하며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위치해 있는 '너무'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해도 괜찮은 것이 기나 할까?  


아빠가 떠난 지 이제 5년이 다 되어간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고 삶이 크게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나란 사람은 원래 반응 속도가 조금 느린 편이다. 조용히 내 삶을 살면서 이따금 떠오르는 아빠의 모습들을 추억했고 아주 천천히 애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애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느낄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회한과 아빠를 외면했던 차가운 마음들이 '죄의식'이라는 깃발이 되어 가슴에 꽂혔나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그와 비슷한 무게의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다. 교차되는 감정 속에서 나는 볼멘소리로 울먹였.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야. 아빠!



내가 쓴 글 속에서 '아빠'라는 존재는 늘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조차도 나는 좋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좋은 아빠가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한 걸 꾸며내는 일만큼 억지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외동딸과 아빠 사이엔 살갑고 애틋한 그 무엇이 존재할 거라고 상상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렇다 할 감정의 연대가 없었다. 이제와 깨닫는 것은 아빠에 대한 나의 맹목적인 미움이 모든 진실을 가리는 눈가리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나 역시 많이 아파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보따리 하나만 싸들고 어린 내 손을 잡고 가출을 감행했던 그 순간부터 내 마음엔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하나 생겼다. 둘이 다시 살림을 합치고 출생신고를 해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해도 그 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내가 쌓은 벽의 안쪽에 숨겨 두었고 아빠는 바깥쪽으로 멀리 내쫓아 버렸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선 그 벽을 절대로 무너뜨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아빠가 있는 쪽으론 한 발짝도 넘어가지 않았다.


내게 아빠는 언제나 낯설고 위험한 존재였다. 아빠가 언젠가 그 벽을 부수고 들어와 엄마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있었다. 나는 오로지 엄마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엄마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면 내게도 유해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렸고, 무능하고 폭력적이고 집착과 억압이 심한 아빠를 거침없이 증오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의 남편이기 이전에 나의 아빠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오로지 엄마의 딸로서만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변명을 하자면 어린 나에겐 부모를 논리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혜가 부족했다.  어른이 된 뒤엔 이미 관성처럼 굳어버린 관계와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아빠를 증오하며 사는 삶은 참으로 초라했다.  아빠를 적으로 여기는 내 존재 역시 한없이 허무했다. 이제 돌아가신 분은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빠에게 마음속으로 묻곤 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은 대체 왜 그랬나요? 당신은 엄마를, 그리고 나를 사랑했나요? 눈가리개를 벗고 오로지 아빠를 아빠로서 다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겐 좀처럼 보이지 않던 아빠의 사랑이 우습게도 반백이 다된 지금에 와서야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곤 한다. 당시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거나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작은 행동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렇게 생명력을 얻고 부활한 아빠의 사랑은 불행히도 나의 죄책감으로 연결된다.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도 않았던 무심하고 냉정한 딸!


하지만 나는 아빠에게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빠를 외면하면서 나를 미워했던 시간만큼, 아빠에게 미안해하면서 또다시 나를 미워하며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의 삶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구차한 변명의 밧줄을 붙들고 매달려서라도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하고 싶다.

  

하늘에 계신 아빠도 나를 이해할 거라 믿는다. 우린  멀리에 있었지만  남인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에도 나는 분명 아빠를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아빠에게 너무 미안해하며 살지는 않기로 한다. 대신 살아 있는 동안 아빠를 떠올리며, 암호 같기만 했던 그분의 사랑 표현을 혼자서 열심히 해독해보려 한다.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억지스럽다 해도 나는 이제부터 아빠를 미워하지 않을 갖가지 이유들을 보물찾기 하듯 샅샅이 찾아내며 살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야, 아빠!


출처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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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사랑

#딸의 죄의식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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