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북은 '내 글이 작품이 되는 법' 시리즈(첫 문장의 힘, 시점의 힘, 묘사의 힘, 퇴고의 힘)의 내용에 제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결합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그러므로 작법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은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소설 쓰기에 대한 내용이지만, 일반적인 글쓰기에 대한 팁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연재북을 쓰면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함께 성장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샌드라 거스는 서두에서 완수해야 할 임무로 다음의 열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1. 독자의 마음을 낚고 관심을 붙잡아둔다.
2. 주인공을 소개한다.
3. 행동으로 시작한다.
4. 책의 어조를 비롯하여 책에 대한 다른 기대치를 설정한다.
5. 시간과 장소를 확립한다.
6. 시점을 확립한다.
7. 인물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와 실패의 대가를 소개한다.
8. 이야기의 갈등에 시동을 건다.
9. 주인공의 인물 궤적을 준비한다.
10. 이야기의 결말에 대한 전조를 마련한다.
이번 글에서는 4~10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는 독자에게 이 책이 어떤 종류의 책이 될 것인지 약속하는 곳입니다. 우선 책의 장르를 뚜렷하게 암시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다른 장르로 오해할 만한 요소를 넣지는 말아야 합니다. 로맨스면 로맨스, 스릴러면 스릴러인 거죠.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야기를 하는 화자의 태도(어조)를 설정합니다. 비관적인가? 익살스러운가? 따스한가? 슬픈가? 첫 페이지에서 설정한 어조는 나머지 부분에서도 일관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이야기가 언제, 어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지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요령이 있습니다. 간결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과도한 정보는 독자를 숨 막히게 합니다. 그리고 배경 묘사에 시각 외에 다른 감각을 적어도 한 가지는 덧붙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자가 배경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나는 혼자 어두운 부엌에 남아 그녀의 흰 뒷모습을 삼킨 방문을 바라보았다.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작가가 내키는 대로 다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묘사가 인물의 시점을 위반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주위의 모습을 눈여겨 볼 만한 합당한 이유를 부여해야만 합니다.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인물의 눈길을 잡아끄는가 판단해야 합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가 한밤중에 냉장고 앞에서 하는 기이한 행동을 발견하고는 아내의 모습과 배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눈을 통해 우리도 그녀의 행동과 주위 모습을 눈여겨 보게 되는 거고요. 그리고 그 안에서 주인공이 그 환경을 어떻게 느끼는지도 암시해야 합니다.
욕조 위로 시커멓게 뚫린 환풍구에서, 바닥과 벽의 흰 타일들에서 냉혹한 계절의 적막감이 느껴졌다.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구체적이고 명확한 명사를 사용합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가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것들을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샤브샤브용 쇠고기와 돼지고기 삼겹살, 커다란 우족 두 짝, 위생팩에 담긴 오징어들, 시골의 장모가 얼마 전에 보낸 잘 손질된 장어' 등으로 최대한 구체적으로 표현했지요.
힘이 강하고 동적인 동사를 사용합니다. 아래의 정적인 표현과 동적인 표현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정적인 표현 :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내 눈이 비쳤어.
동적인 표현 :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채식주의자' 중에서)
인물의 성격에 들어맞는 참신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합니다.
뿌옇게 분이 떠, 그녀의 얼굴은 먼지를 뒤집어쓴 헝겊인형 같아졌다.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시점이란 소설을 이야기는 화자의 관점을 가리킵니다. 대부분의 소설이 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이지요. 1인칭 '나'를 사용하느냐 3인칭 '그나 그녀'를 사용하는가가 달라질 뿐입니다. 소설을 쓸 땐 단일 시점으로 쓸지 다중 시점으로 쓸지도 결정합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즉시 '누구'의 이야기인지 확립해야 합니다. 바로 첫 문장에서 시점을 확립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주인공의 감각을 통해 걸러내어 표현합니다. 인물이 눈여겨볼 법한 세부 사항만을 언급합니다. 인물의 머리와 가슴 속으로 들어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이때 반드시 '말하는' 대신 '보여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는 꼼짝 않고 서서 냉장고를 마주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옆얼굴의 표정을 식별할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가 섬뜩했다. 그녀의 숱 많은,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는 부스스하게 부풀어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흰 잠옷치마는 언제나처럼 끝부분이 약간 위로 말려 있었다.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다중 시점을 이용한다면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너무 빨리 시점을 전환해도 안 되고 너무 늦게 전환해도 안 됩니다. 단, 한 장면 안에서는 절대로 시점을 전환하지 마십시오. 시점을 전환하고자 한다면 즉시 새로운 시점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어떤 시점을 선택하여 쓰느냐는 작가의 마음이지만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시점 인물이 세 명 등장합니다. 첫 장은 영혜의 남편인 '나', 두 번째 장은 형부인 '그', 세 번째 장은 언니인 '그녀'이지요. 실제로 이 세 편은 각각 중편소설로 먼저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장편 소설은 호흡이 길어서 시점 인물의 전환이 일어나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각각의 이야기에 독자가 충분히 몰입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단편이나 중편소설에서 여러 명의 시점 인물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빠르거나 잦은 시점의 전환은 독자가 어떤 한 인물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 어렵게 만드니까요. 예전에 말씀드렸듯 독자가 주인공에게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을 계속해서 읽기 힘들어집니다.
주인공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야 독자가 흥미를 느낍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목표가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표와 꼭 같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단 목표에는 반드시 위험 부담이 따라야 하며 그것이 주인공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여야 합니다. 주인공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독자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아내의 채식이 '나'나 '아내'에게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변화가 아니라면('나'가 별다른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그녀'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여긴다면) 독자들 역시 아무 긴장감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
주인공이 노력도 걱정도 없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긴장감이 없고 인물이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갈등은 목표를 방해할 때 생깁니다. 서두에서는 갈등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일지라도요. 장애물에 주인공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이야기의 중심 갈등을 소개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1막 안에서는 중심 갈등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채식주의자'로 돌아가 서두에서 이 소설을 관통하는 중심 갈등이 등장하지요.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괴상한 꿈을 꾼 후 채식을 시작하면서 생긴 '나'와의 갈등 그리고 가족들과의 갈등이 그것이었지요.
인물의 내적 여정을 인물 궤적이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겪는 감정적 변화를 말합니다. 인물 궤적을 수립하기 위해선 변화의 필요성을 우선 확립해야 합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아주 중대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채식주의자'에서 '나'는 아내의 채식 선언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아내'는 채식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지요. '채식 선언 혹은 육식 거부'는 변화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결점인 거지요. 누누이 말했듯 독자에게 결점이나 두려움에 대해 말로 하지 말고 행동과 대화를 통해 보여줘야 합니다. '채식주의자'의 서두에서는 영혜가 고기를 버리고 채식을 하는 모습을 오로지 대화와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점이나 두려움이 시작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은 조금 더 뒤에 가서야 나오지요.
서두는 결말을 어떤 식으로든 준비하고 암시해야 합니다. 절정에서는 서두에서 제기한 중심 의문에 답을 제시하고 두려움 혹은 결점을 인물이 극복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마지막 장면과 시작 장면을 서로 비슷한 상황으로 제시하여 대조시킬 수도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을 격렬하게 거부하던 영혜가 마지막에는 정말로 말도 생각도 사라진 나무, 아니 식물이 되어 버리려 하고 있지요. 그녀의 육식 거부는 결국 그녀 자신이 식물이 되는 결말과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 글(03화 서두에는 완수할 임무가 있다 1)에 이어 나머지 임무들에 대해서도 알아 보았습니다. 여전히 감이 오지 않나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고민해 보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소설을 쓸 때 무의식이 반응하게 될 테니까요. 다음 글에선 '서두에서 저지르기 쉬운 치명적인 실수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질문들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이 쓴 서두를 점검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의 장르나 어조, 분위기 등을 독자가 알게 하였는가?
독자에게 배경을 생생하게 묘사(두 가지 이상의 감각 사용)하여 보여 주었는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명사, 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는가?
인물의 성격에 맞는 참신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하였는가?
첫 문장에서 시점을 확립하였는가?
다중 시점을 사용하면서 독자에게 혼란을 주진 않았는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였는가?
주인공의 갈등과 그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는가?
인물의 중대한 결점과 두려움이 드러나 있어서 변화의 필요성을 확립하였는가?
서두가 결말을 적절히 암시하고 있는가?
밀리의 서재 우수작품상에 당선된 초단편소설집 '돈 워리'의 이번 주 연재 소설이 궁금하신 분은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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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가 발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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