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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Feb 09. 2021

을지로에서 카오산로드를 만났다:도이농

을지로는 설렁탕도, 커피도 아닌 쌀국수 아잉교.

대학생 시절 40일의 인도 여행 이후 가장 길게 떠난 여행이 태국 여행이었다. 총 여행 기간 2주 중 치앙마이에서 보낸 5일을 제외하면 거의 방콕, 그것도 카오산 로드에서 보냈다. 그 이후로도 뭔가 제멋대로 살고 싶을 때는 간단한 옷과 MacBook, 카메라만 챙겨들고 훌쩍 방콕으로 날아가곤 했다. 프리랜서 콘텐츠 작가란게 이럴 때는 정말 좋은 직업이구나 싶더라. 취재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인터넷만 있다면 전세계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엔 옴짝달싹 못하다보니 프리랜서나 직장인이나 모두 똑같은 집콕 재택근무 신세. 어느날 카오산 로드가 몸서리치게 그리워 지인의 SNS에서 본 곳으로 향했다.

이 언발란스한 풍경을 보라. 소고기 쌀국수인데 네온싸인엔 또 치킨.....

‘도이농’은 을지로 인쇄골목 부근의 좀 말도 안되는 곳에 있는 태국식 쌀국수집이다. 이게 얼마나 엉뚱하냐면, 죄다 판촉물 인쇄 상점이 있고 앞에는 설렁탕집 이남장, 근처에는 군만두가 기가막힌 오구반점과 각종 한식 백반이 즐비하고…옆에는 스타벅스, 한쪽 구석에는 커피 한약방이 있는 빌딩 뒷쪽 건물에 태국식 쌀국수라니…. 계단을 올라서면 만날 수 있는 저 호프집스런 네온사인도 웃기다. 이것이 온갖 나라 문화의 멜팅팟 카오산로드 스타일이 아니고 뭔가. 좀 억지스럽나? 하여간….

아… 나쁜 예감은 현실로…… 아무리 점심시간이라지만 코로나 따위는 꺼지라는듯 사람이 많네 그려. 방역 수칙을 지키기 위해 테이블을 죄다 떼어놓긴 하지만 좀 찜찜한건 사실. 쌀국수를 하나 시키고 저 구석 1인석에 짱박혀 본다. 오 근데, 입구부터 심상치 않더니 가구와 식기 등 가재도구까지 제대로 태국식이다.

거꾸로 붙은 '당기시오' 스티커와 어정쩡한 스뎅 집기들. 음식 가격 빼고는 제대로 태국.

주방도 마찬가지. 짭쪼름한 간장 냄새에 뭔가 쿰쿰한 육수 졸은 냄새가 제대로 태국이네. 뭐 상식이랄 것도 없지만 쌀국수라고 다 같은게 아니다. 면과 육수, 고명까지 많이 다르지만 일단 눈에 팍 차이나는건 국물 스타일. 베트남 쌀국수는 기본적으로 맑고 담백한 국물에 레몬글라스, 고수, 바질, 민트, 딜 등 오만 향채가 다 들어간다. 하지만 태국은 진한 갈색 육수에 고수와 숙주, 모닝글로리와 튀긴 마늘 등 비교적 단촐한 고명이다. 가게 이름 대로, 도이농의 쌀국수는 정확히 태국식.

데친 쌀국수를 생숙주에 얹고 육수를 곱게 부어낸 뒤 쪽파와 튀긴 마늘을 토핑한다,. 아무래도 고수는 한국에서 못먹는 사람들이 좀 있다 보니 따로 달라면 추가해 준다. 고수를 추가해 한 젓가락 집어 올리면 기분좋게 짝 붙는 짠 맛이 입 속을 감싼다. 좋다. 이게 진짜 태국이지. 쪽파의 강한 향과 고수의 기분좋은 비누맛이 자동으로 면치기 하게 만든다. 가끔 느껴지는 튀긴 마늘의 향은 보너스. 베트남 쌀국수보다 조금은 두툼한, 국물을 잘 먹은 면이 짭짤하게 넘어간다.  

부드럽고 질좋은 소고기 양지/사태살도 그득. 얇게 썰어내는 베트남 쌀국수의 고기 고명과는 달리 태국식은 주로 깍둑썰기다. 이렇게 하면 면을 고기로 싸먹을 수는 없지만 육즙이 훨씬 잘 느껴진다. 매번 뭐 먹을때마다 아차하는건데, 아.. 차 좀 끌고 다니지 말아야지. 여기에 맥주 한 잔 해야 하는데.... 몇 번 면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그릇은 오링. 입 속에는 기분좋은 짠 맛과 젓갈의 감칠맛이 남아있다.


단 하나의 별수 없는 단점. 물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건데, 도이농에 들어가면 너무 태국 느낌이 나다 보니 왠지 자꾸 태국의 물가가 생각날 수 밖에 없다. 8천원이면 카오산로드 길거리에서 팟타이에 맥주 한 캔 사먹고 기념 티셔츠 하나 살 정도의 돈. 하지만 8,000원에 태국에 30분 정도 비자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게 어디 보통 일인가. 방콕과 카오산로드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내일이라도 자리를 걷어차고 도이농으로 달려가자. 후식은 커피 한약방 추천!!!!


어려운 시즌, 갑갑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먹으러 다니는것밖에 없다. 다행히도 서울은 이제 메가시티라 별별 음식이 다있는 곳. 앞으로도 서울의 이러한 뛰어난 인프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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