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신상이었다. 엄청난 용량과 속도를 자랑했다.
혈기왕성했다.
일도 사랑도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에 대한 열정도 불타올랐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아들딸도 낳았다.
일을 하고 일을 하고 또 일을 했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느려져갔다.
세월이 흐른다고 반드시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의 실수가 두 번 세 번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처지고 굳어가고 밀려난다는 것을 느꼈다.
때로는 꼰대라고 손가락질받는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갈라서고 미워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쁜 것은 점점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아직도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처음 그때처럼 불안하고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직도 서툴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아직 전원을 꺼버릴 때는 아니다.
용량이 적은 만큼 지울 것은 지우고 새로 채울 것은 채워야 한다.
느리고 둔한 만큼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직도 실수하고 방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끝없이 신호를 찾아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
누구나 그렇듯,
이번 생이 처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