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에게 물어라> 중 나를 깨우는 한 문장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무력과 금전 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도 힘이 있다. 천지를 뒤흔들 힘이.’
-야마모토 겐이치, 소설 ‘ 리큐에게 물어라’ 중
새로 시작한 건축 기획물 취재를 위해 건축가인 ㅈ 교수님께 전화를 했다. 안부를 나누고 요즘 무엇을 하시느냐가 여쭈니 소설을 한 권 읽고 있는 중인데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아주 흥미롭다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야마모토 겐이치의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문학동네)이다.
작가인 야마코토 겐이치는 교토 출신으로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의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 편집부를 거쳐 소설가로 데뷔한 이력을 지닌다. 다도의 명인 센리큐와 전국시대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화에 독자적 해석과 드라마를 가미해 장편 소설을 썼고 140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일본 '와비 다도'의 전통을 세운 전설적인 다인 (茶人) 센리큐가 할복하는 날(1591년 2월 28일)부터 시작한다. 천하의 권력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부적 미적 감각을 지닌 리큐가 방자하다는 이유만으로 리큐에게 할복자살을 명했다. 주위의 질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리큐의 절대 미감을 따를 수 없는 것에 대한 히데요시의 질투가 분노를 일으켰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대상은 오로지 한 가지, 아름다운 것 뿐이었으니.
'칠십 인생 오호라 오호라 이 내 보검 선조와 부처를 더불어 죽이리니
내 익숙한 검 한 자루 들어 지금 이 시간 하늘에 내던지리라'
70세의 리큐는 1첩 반 다실에서 자신이 지은 마지막 게偈를 읽고 할복한다. 장식단에는 무궁화 가지와 녹색 향합이 놓여 있었다. 소설은 할복 전으로 시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행된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권력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검과 권력을 휘둘렀으나 리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박한 차 한잔을 통해 절대적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 관심이 없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적 물건이 리큐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녹색 도자기로 된 자그마한 향합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지극한 아름다움의 상징인 녹색 향합은 리큐에게 '쓸쓸하고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다도를 가르쳐 준 조선 여인의 유품이다.
작가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노렸으나 센리큐는 끝까지 이를 반대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센리큐가 조선 막사발 모양의 이도다완을 높이 평가했던 점 등을 소설에 녹여냈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조선에서 끌려온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냈다.
소설 속의 조선 여인은 고귀한 집안 출신으로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해적에게 버려져 일본까지 팔려온 기구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고아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초연하게 받아 들였다. 열아홉의 리큐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그 여인이 권력자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 없어 함께 도망치지만 막다른 곳에서 붙잡히고 결국 그녀에게 독이 든 차를 마시게 한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흰색 무궁화 꽃을 보고 미소 지었던 여인이 품 안에 지니고 있던 향합을 리큐는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았다.
하루를 피어도 스스로 화려하니 죽음을 두려워하리. 궁극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죽음과 맞바꿀 정도의 극한의 것.
오다 노부나가의 다인이던 센리큐는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권력을 잡고 관백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인이 된다. 하지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는 아무리 해도 그의 미감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너무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미움을 사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마지막으로 센리큐의 차를 마시고 싶어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 그에게 센리큐는 꽃 봉오리를 보면서 생명의 발아를 느끼고 여유롭고 한가함을 느끼라고 한다. 그리고 소박한 차 한잔으로 지금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는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 훗날 조선침략의 야욕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센리큐는 와비 다도를 주창했는데 와비 다도는 순수, 소박, 단순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와비의 개념을 다도에 처음 적용한 이는 나라의 승려 출신인 무라타 주코다. 그는 작은 초암에서 간소하게 즐기는 다도를 통해 선과 다도를 결합했다. 무라타 주코의 문하에 있던 다 키니 조오가 이를 이어받았고 제자 리큐에 이르러 와비차는 완성된다.
리큐는 열아홉에 다케노 조오의 문하에 들어가는데 소설가 야마모토 겐이치는 이때를 고귀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조선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도의 정신과 만남으로 드라마틱하게 전환한 듯하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다실로 쓰는 초막의 분위기, 다기, 다실을 장식하는 족자와 꽃꽂이 등 일본 특유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어서 훌륭하게 책을 보완해 준다. ( 원서 표지에는 무궁화 꽃이 있지만 문학동네에서 번역출간한 책의 표지엔 붉은 동백이 사용됐다. 왜일까?)
센리큐는 다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드러나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삶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름다움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