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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Jul 24. 2024

차근차근 기억나지 않아요

거짓치매

우울증이 심해지면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걸 거짓치매라고도 부르는 듯 하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고,

포털 사이트에 우울증과 기억력 감퇴만 검색해도

많은 내용이 나오니

학술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 만큼 우울증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아무튼

이번 에피소드는

우울증과 기억력 감퇴에 대한 은재의 경험을 말해보고자 한다.




은재는 현재

정말 대부분의 것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취업 준비를 위해 자기 소개서를 써야 하는데

은재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지 않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을 들여다 봐야 했다.


그리고 자격증 시험을 볼 때도

외운 것들이 전처럼 바로 바로

흡착되지 않아서

몇 번이고 교재를 들여다 봐야했다.


또 사소하게는

친구들과의 추억들을 기억하지 못해

친구를 서운하게 만든 적도 있었고, 

고양이들의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것을 잊거나

약속 시간 혹은 약속 자체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하지만 옛날에 은재는 기억에 대한 강박이 대단했다.

은재는 중대한 일들뿐만 아니라

가령 이런 것들까지 기억했다.


화장실을 간 횟수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에 비례하는

하루 동안 마신 물의 총 양을 기억했다.


잠든 시간과 일어난 시간을 기억했다.

그리고 하루 수면 시간을 체크해서

며칠 동안 수면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매일 등교할 때 지나가는 사거리 신호등이 켜지는 시각을 기억했다.

지금은 거짓치매로 확실하지 않지만

7시 51분인가 그랬던 것 같다.

당시 은재는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었다.


그리고

칫솔을 바꾼 때

치약을 새로 뜯은 때를 기억하거나

두루마리 화장지를 새로 뜯은 때를 기억하기도 했다.


하지만

3년이나 약을 먹어오면서

기억에 대한 강박은 사라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제 은재는 화장실에 간 횟수나

수면 시간, 수면 리듬

어딘가 신호등이 켜지는 시각 따위를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공간에 정보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딘가로 새어나갔다.


그러니 은재는 몇 가지 걱정이 되었다.


먼저, 단지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것뿐인데

전체적인 자신감이 떨어졌다.

예를 들어, 일을 한다고 치자.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붕어 대가리로는 자꾸 뭔가를 까먹을 것이다.

까먹고 무언가 실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메모를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고 해도

물어볼 때마다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고

메모를 뒤적거리는 신입사원은

꼴사나워 보일 것이다.

은재는 그런 상상을 하고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무언가를 공부한다고 해도 자꾸 잊는다는 것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어떤 것이든 공부를 하는 것에서도 확신이 없었다.


또 빈틈이 보이는 것.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빈틈이

나 자신을 헐렁하게 보이게 할까봐

은재는 그것도 걱정되었다.

(은재는 강박적인 사람이며 빈틈을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은재는 사람과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친구와의 시간들이

사랑스러운 하루들이

손 안에 움켜진 모래알처럼 후두두

떨어지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니까

지금의 애인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고백했던 순간의 대화,

싸웠을 때의 날씨,

화해한 이유,

하루 하루의 데이트들,

그 모든 순간들을 허울이 되어버릴까봐.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나 할 법한 고민을…….


그래서 결과적으로

은재는 취업에 주저하는 중이었고,

공부를 포기했다.

그리고 병에 걸린 사람처럼 사람과의 일들,

특히나 사랑에 대하여

기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집착적으로 복기했고,

자주 사진을 찍어두고, 메모를 했으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은재는 아마 약을 먹음으로써

정신이 멍해지고,

몽롱해지는 과정에서

기억력에 손상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멋대로 연결지었다)


그렇다면 약을 줄이면

이 몽롱함에서부터 벗어나

또렷한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기억할 것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그러면서 현재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몸짓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약을 줄인다는 것,

그 사실에 대해 은재는 강력한 불안을 느꼈다.


이럴 때면 지금의 애인은 은재에게

천천히 하라고 늘 말했다.


은재는 애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래도 기억에 관해 옭아매지 않으면서

편해진 것들도 있다고 생각을 바꿨다.


가령,

은재는 이제 더 이상 마시는 물 리터를 체크하지 않으면서

배가 불러도 물을 마시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고,

신호등이 켜지는 시각을 모름으로써

마음을 재촉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공부한 시간을 정밀히 체크하지 않으면서

공부 시간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화장실에 가는 횟수를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방광염에 걸린 걸까? 하는 의심을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에 대한 강박이 풀어지면서

은재는 조금 편안한 삶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추억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꼭 기억으로만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은재는

허공의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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