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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Jul 27. 2024

자해에 대하여Ⅰ

자해를 하는 이유

【19세 미만은 들어오지 마세요】




초등학생 때

손목에 커터칼로 별 무늬를 만들어서

보여준 여자애가 있었다.


그 의기양양한 표정을

은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지금에 이르러

그 장면을 회상하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 여자애의 표정이

지금은 선명히 이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은재는 어제 자해를 했다.


가슴이 숨으로 가득 차버려선 터질 것 같고,

머릿속에 수많은 삽화들이 가득 차 미칠 것 같고,

온몸으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어 소름이 끼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울다가 지쳐 자해를 했다.


자해는 소리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은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래 자지도 못해 피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오늘도 덥구나.


이제 매미가 운다.

매미가 우는 소리가 일정하고

시끄럽다.


은재는 손을 뻗어

붉은 피가 딱지가 되어 앉은 걸

바라봤다.


체온이 높은 손으로

손목을 만졌다.

상처가 입체적으로 따가워지면서

화끈 거렸다.


은재는 자신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해를 했었다고 회상했다.


학습지를 할 적에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주먹으로 머리통을 내리치거나

허벅지를 때렸었다.

그리고 그 충동적인 행동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러니까 은재는 습관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자해를 해왔기 때문일까?


우울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을 때

은재는 쉽게 도구를 써 자해를 했다.


은재는 침대에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저리며

왜 자해를 했을까?

어쩌다 자해를 했던 걸까?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충동적으로 했던 자해와

명확히 우울감이 들어서 해버렸던 자해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은재 내면에서 일어난 소용돌이를

배설해내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감정의 배설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한 가지의 효과를 기대한다.

바로 해소.

은재는 해당 행위를 하면서 그것들을 느꼈고

이내 이전의 폭발 혹은 들끓음보다

잠잠한 어떤 것을 얻었다.


그리고 은재는 생각했다.


어느 날에는

푸름이 짙어져 숨이 막힌 와중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신의 주변에 대해

항의하듯 자해를 했었다고.


말이 공황장애지,

공황장애뿐 아니라 푸름에 쌓여

그 냄새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은재는 외로웠다.

그리고 자신의 SOS 신호들을

모두가 알면서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해를 했었다고.


내가 얼마나 아픈지 보여줄게.


그런 못된 마음이 들었다고.


이를 쉽게

보여주기식 자해라고

은재는 스스로 명명했다.


그러면 전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기위로식 자해?

그거면 충분할까.


그리고는 제일 최악인 것은

자기위로식의 그것보다

보여주기식의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은재는 3년 동안 푸름을 앓으면서

해당 행위로 인해

나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노라 생각하니까.


그래서 지금 은재에게 자해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관계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에)


그래서 이제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사용했던 도구를 미련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퉁.

비어버린 휴지통에서 마음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방금의 다짐은 리본처럼 풀릴 것이다)


은재는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앞으로 몇 분 뒤,

가족과 점심을 먹을 자리에서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색한 공기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동자

보지 않고, 언급하지 않으려는 노력들.


후.


자해라는 거,

그거 생각보다 귀찮은 거거든.


은재는 허공에다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그 순간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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