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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그루 Aug 20. 2021

다시 태어난 순간이 있나요!?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글. 그림, 황진희 옮김, 거북이 북스

일본 작가 사노 요코의 그림책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라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그림책은 십 이년 전, 어렵게 아기천사가 찾아왔을 때 나보다 먼저 출산을 하고 엄마가 된 친구가 선물해 준 그림책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책이란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태어난 아이>는 표지부터 마음이 가지 않았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한 아이가 등장하는데, 아이의 표정도 아이답지 않게 서늘했고, 색깔 역시 초록색과 붉은색 두 가지 색만이 칠해져 있는데 그마저 찔리면 따끔한 가시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림책 속 서늘한 표정을 한 아이와 그 가시 같던 뾰족한 그림체에 결국 마음이 홀린 때는 첫 번째 찾아온 아기천사를 잃어버린 후였다. 아기의 심장이 멈추었는지 몰랐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책이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고  또 그 어른들 안에 여전히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으로 우주 공간을 날마다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별 사이를 걷다가 뾰족한 별에 부딪쳐도 아프지 않고 태양 가까이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지구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자를 만나도 무섭지 않았고 모기에 물려도 가렵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냄새를 맡고 따라와서는 아이를 날름날름 핥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역시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란 얼굴을 만드는 아이의 표정을 발견했는데 그 장면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의 살내음을 알아주고 내게 먼저 다가 와주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에 반응했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표정을 선물한 이 강아지는 항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옆을 지킨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강아지가 공원에 있을 때 한 여자아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한테 인사를 하지만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강아지가 여자아이의 엉덩이와 다리를 물어버린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강아지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팔과 다리는 문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여자아이는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고 여자아이의 엄마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불현듯 자기도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 졌고 “반창고 반창고!”를 외치다가 “엄마!”하고 마침내 태어난다. 아이는 내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돌아다녔는데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서 태어난 이 장면에 와서야 비로소 옷을 입고 등장한다. 옷을 입는다는 것이 이제는 이 세상과 상관이 있다는 뜻인 것 마냥 아이는 배고픔도 느끼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모기한테 물린 곳이 가렵기도 하고 바람이 불면 깔깔깔 웃기까지 한다, 그렇게 밤이 되고 아이는 ‘태어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고 말하며 잠이 든다. 아이가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늘 함께 하던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이 그림책은 태어나지 않아서 아무 상관이 없었던 아이의 냄새를 맡고 아이의 맨살을 날름날름 핥았던 강아지와 같았다. 첫아기천사를 잃고 망연자실해 있던 나에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넣어 준 소중한 그림책이다. 지금은 강아지가 없어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이 피곤한 삶을 거뜬히 살아갈 힘을 내 안에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의 내공도 생겼지만 그림책은 어느 순간 내가 지치고 힘들 때면 언제든지 다가와 내 옆에 살며시 앉아 주는 ‘강아지’ 같은 존재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날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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