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 걸까
IMF 때, 아빠는 실직했고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아빠는 거의 1년 정도를 쉬었다. 엄마도 드문드문 일을 하셨던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의 가계는 쪼들렸을 것이다.
아마 나와 내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도 용돈을 거의 주지 않았던 엄마의 습관은 그때 형성되었던 것 같다. 우리 남매는 매번 군것질할 용돈이 없어서 학교가 마치자마자 집으로 바로 들어왔다. 둘 다 그 당시의 원망과 스트레스로 대학생이 되자 쇼핑 중독에 빠졌고 인터넷 쇼핑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거의 다 썼다. 우리 남매는 서로 경쟁하듯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어서는 옷과 화장품(동생은 소형 가전제품)을 사들였었다. 필요해서라기보다 그걸 사는 것으로 어린 시절에 풀지 못한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것이었다.
IMF 시기, 집에 돈이 없어서 나는 꼭 다니고 싶었던 미술학원도, 남들 다 가는 학원도 못 갔지만 그래도 집에 가면 아빠가 있다는 게 좋았다.
엄마는 그간 우리 연년생 남매의 육아에 지쳐서였겠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시절 당연한 것으로 강요된 가정주부로서의 절대적인 책임감 때문에 해야 할 살림을 다 하기는 했으나 마지못해 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하기 싫음’을 매일 느꼈다. 아마 성인이 된 내가 결혼이 하고 싶지 않은 건 그때의 엄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행동과 분위기로 느낄 수 있었다.
‘집안일은 지긋지긋해.’
‘아이들은 더 지긋지긋해.’
‘아주 다 지겨워 죽겠어.’
엄마는 집에 있을 때 밥을 차리자마자 먹어, 하고 방에 들어가기 일쑤였고 도중에 나와서는 넌 왜 매일 먹냐, 따위의 말을 했다. 내가 알아서 차려 먹겠다는데도 위에 말한 가정주부로서의 절대적인 책임감 때문에 굳이 차려 주시고는, 그래 놓고 또 밥을 먹고 있으면 갑자기 나와서 매번 그 말을 했다. 넌 왜 매일 먹니. 나는 매일 밥을 먹으며, 먹는 중간에 엄마가 나오지 않길 기도했다. 기도빨은 반반이었지만 안 하면 불안했다.
아빠는 백수가 되자 일주일에 한두 번 요리를 해서 차려주곤 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방에 들어가는 대신, 아빠 요리 실력이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파는 음식 같은 맛이 났고 나는 아빠가 집에서 살림하고 요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생은 영혼 없이 그냥 먹을 만하다고 말해서 이 눈치 없는 놈 때문에 아빠가 실망해서 다시는 요리를 안 해주시면 어쩌나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그러시지는 않았다.
그 외 시간에 아빠는 주로 바둑 기보를 보거나 네오스톤 바둑을 하고, 나는 숙제를 하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그때 집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어서 집에서 책 보고 TV나 보는 대신 그 많은 널널했던 시간에 성적 관련 학원을 꾸준히 다니고 입시 정보에 관심을 쏟았다면 좀 더 높은 목표의식을 가지고 성적을 올려 더 좋은 대학을 갔을까, 지금 좀 여유로운 삶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란 인간은 공부가 재미있긴 했지만 또 그렇게 열심히 하거나 잘하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공부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학원을 보내주셨다면 주변 친구들에 비해 뒤쳐지기 싫어 좀 더 했을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학교 숙제 이상의 공부를 하진 않았다. 아주 가끔 숙제를 하다 보니 뒷단원이 내가 관심 있는 단원이면 예습하는 일이 있었지만, 별로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와 습관은 특히 어릴 때 변화 가능성이 가장 많을 때라서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다면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든다. 학창 시절의 부족한 여건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아쉽기야 하지만 그때 우리 집보다 더 주저앉은 집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테고, 혹독한 IMF를 함께 거친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 정도 부족을 원망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와 아빠, 둘 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 하셨고 공부를 위해 우리에게 해주신 게 없었던 만큼 우리 남매의 성적 나쁨을 지적하거나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신 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핏줄 때문에 공부를 못 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크면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빅데이터를 돌리지 않아도, 빨래, 청소, 요리 같은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많이 했는지 통계를 낸다면 아빠보다 엄마가 해준 것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아무리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최소한 내 기억으로, 아빠가 빨래나 청소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빠에게 조금 더 친밀함을 느끼고, 훨씬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생각이 바뀌지가 않는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바꿀 의지가 없는 것도 추가적인 문제라면 문제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가 나와 동생을 위해 들인 물리적 노동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바뀔 수 없는 팩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빠의 적은 물리적 노동시간보다 최소한 집에 들어가서 평온한 느낌으로 지내볼 수 있었던 임팩트가 나에게는 더 중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공평하지 않다고, 누가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아빠와의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매일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시간들이었다.
항상 곁에 있었지만 따스한 적 없었던 엄마와
거의 곁에 없었지만 있을 때는 잘했었던 아빠.
팩트가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임팩트를 이길 수가 없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