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은 여태껏 방문한 어떤 도시보다 교통비가 비쌌다. 1회권 비용이 2.3유로, 한국 돈으로 3,000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지불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노라면 당연히 교통비가 저렴한 한국이 그리워진다. 심지어 환승 혜택조차 없어서 더욱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비싼 교통비도 나를 놀라게 하지만, 내가 더 놀랐던 것은 펀칭 시스템이었다. 동유럽 국가에서는 한국처럼 교통권을 찍거나, 검표를 받아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직접 펀칭을 하고 이용한다. 만약 이 시스템을 악용한다면 1회 교통권을 구매한 뒤 펀칭을 하지 않아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펀칭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몇십 배가 넘는 위약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는 흔히 교통비가 비싼 이유를 교통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통비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직접 검표하는 것보단 검표 과정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체코와 같은 동유럽권 국가들은 사용자가 직접 티켓을 구매하고 펀칭한다. 가끔 불심검문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내가 3주간 동유럽 국가를 여행하면서 불심검문을 받아본 적은 딱 1번뿐이었다. 그들의 다소 맹목적이다 싶은 신뢰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국은 신용, 체크카드를 찍거나 현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런던과 파리, 로마와 같은 대도시 역시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곳은 모두 교통비를 확실하게 걷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담을 넘듯 게이트를 넘어 다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로 인해 빠져나가는 손실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런던의 대부분 지하철 게이트에는 주황 조끼를 입은 안내원들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비싼 교통비를 내지 않고 도망갈까 싶어서.
이와 달리 동유럽권 국가들은 펀칭 기계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교통권을 발급하는 키오스크뿐 아니라 버스나 트램, 지하철 플랫폼에서도 안내원 또는 검표원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사람을 향한 신뢰 혹은 믿음으로 교통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다.
지난 글에도 언급했듯 오스트리아의 지하철에는 반려동물 티켓이 존재한다. 지하철 승강장과 지하철 내부에서도 쉽게 반려견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여행자인 나에게 이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반려동물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라니. 심지어 케이지에 넣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줄을 한 채로 보호자와 함께 움직인다니. 무척 놀라웠다.
반려동물 티켓은 아동 티켓과 같은 금액으로, 일반 성인 이용금액의 절반 정도이지만, 이 역시 매번 티켓을 산다면 만만치 않은 금액일 것이다. 나는 반려견은 당연히 무료로 이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 티켓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실제로 내가 티켓 판매기에서 반려동물 티켓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 반려동물 티켓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티켓의 존재보다 티켓을 사는 사람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반려동물과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든 보호자가 티켓을 모두 구입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선택권과 동시에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눈살을 찌푸려지는 장면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대중교통권(청소년권, 노약자권)을 이용한다거나, 일정 나이가 지난 아동에게 부과된 금액을 무시하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하려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100%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은 이기심들이 모여서 큰 적자를 이루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은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그들의 안일한 사고방식 때문에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애써 구매한 교통권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더 나아가 반려동물 티켓처럼 신기한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관광객도 현지인도 모두 이런 시스템에 익숙한 것처럼 키오스크에서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고 교통권을 사지 않고 지하철을 타면 걸릴까를 고민했던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개인의 작은 이기심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편법이 아닌 적법을,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을 발휘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학부 시절 배웠던 사회학 과목 중에 범죄와 관련된 과목이 있었다. 수업 내용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범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질문이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은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우리에게 물으셨다.
“어느 나라에서든 범죄는 일어나기 마련인데,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범죄를 줄이는 데 무엇이 가장 효과적일까. 강도 높은 처벌? 엄청난 금액의 범칙금? 범죄자라는 낙인?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수업에서 내가 배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서로를 향한 신뢰였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그래서 믿음직스럽지 않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 나를 믿어주고 끝까지 나를 책임지고 교육하며, 훈육한다는 사실이 범죄자의 재범률을 낮추었고, 범죄를 시작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은 서로를 신뢰하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심지어 공공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이 하루에도 여러 번 걸려올 정도다.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신뢰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삶을 살아내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의심한다. 내가 먹는 음식, 내가 가진 물건, 내가 사는 집, 내가 소속된 학교 또는 직장 심지어는 내 가족과 친구까지도. 끝없는 의심의 결과로 우리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피해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 아무것도 믿을 것 하나 없다는 허무주의? 결국 무언가를 의심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행위다. 누군가를 믿지 못해서 우리가 끝없이 검증하는 과정은 결국 피해를 줄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착취하고 소모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믿고 수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나 자신만이라도 다른 이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타인에게 신뢰를 얻을만한 사람인가 고민해보면 좋겠다. 나의 행동과 사고방식, 나의 삶이 타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인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믿으며 살고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적어도 나를 믿는 이에게, 나를 신뢰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끝없는 신뢰를 제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적어도 나부터라도 남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