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의 나에게 심심한 애도를 전합니다.
남자들의 무용담의 필수가 '군대 훈련소'라면, 아줌마들 무용담의 꽃은 '출산과 조리원'일거다. 때는 코로나여서 남편 말고는 조리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 내가 들어간 조리원은 '모유 수유'를 매우 권장하는 곳이었다.
단연코 내 인생에서 호르몬 영향이 가장 강력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신생아실에 두고 방에서 좀 누워 있을라치면 가슴에 핑그르 젖이 돌았다. 젖 양을 늘리는 게 좋다는 말에 유축을 꽤 열심히 했는데, 그러고 있자면 현타가 온다. 내 가슴에서 젖이 나오다니?! OMG
조리원 괴담, 유축과 젖 몸살 그 긴 밤의 추억.
초유는 아이에게 너무 너무 중요하니 꼭 먹여야 한다는 조리원 선생님의 이야기에 뭔가 비장한 심정이 되었던거 같다. 젖몸살이 나서 찾은 마사지 실에서는 젖이 잘 나오겠네 마네 꼭지 모양이 물기가 좋네 마네 그런 관점에서 가슴에 대해서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인정사정없는 가슴마사지, 생각하니 지금도 으악 소리가 난다.
40여년 몰랐는데 내 가슴이 젖이었다니. 충격이었다. 내 몸이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낯설었다. 가슴은 일종의 미학과 유희를 위해 존재했었다. 아이에게 젖을 주는 기능이라니 내 몸을 다시 보게 된다.
젖의 기능이란 꽤나 기술적이었는데, 시간마다 유축기 앞에서 젖 양을 늘리고 유축을 하고 나면 정작 아이에게 젖을 줄 땐 젖이 비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밤새 젖이 돌아서 잠을 못자고 차가운 얼음 팩을 끼고 잠을 자야했다. 축축한 얼음팩이 번거롭고 깊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름의 사이클을 만들어 가는 데 꽤 힘이 들었었다.
그 고생을 해서 반병 겨우 채운 젖병을 가져다 놓을 때면 노오란 젖이 꽉 차서 찰랑거리는 딴 집 애들 젖병이 왜 그리 크게 보이던지, 아기 젖병 냉장고에서 방으로 오는 길이 더 멀어졌다.캄캄한 밤에 젖병 냉장고 불빛에 의지하여 걷는 그 복도는 여고괴담에 나오는 그 복도 못지 않은 음산함이 있다. 산모방 어디선가는 젖 몸살 때문에 신음하는 소리라도 흘러나오자면 이것은 공포물의 완벽한 서막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2-3시간에 한번씩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젖 양이 적으면 아이가 짜증내며 울었고, 젖 양이 많을 땐 목 넘김이 심해서 울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 나는 나대로 따라 울었다.
남편아. 우린 같은 팀이어야지.
아이가 먹고 난 후에는 목을 가누지 않는 아이를 어깨에 두고 토닥토닥 트름을 시켰다. 소화기가 미숙해 트름을 하지 않으면 아기가 배가 아파서 다리를 꼬아가며 울었고, 트름을 하다가 토하기도 일쑤였다. 이럴수가 나는 아는 게 없고 미숙했다. 남편도 매 한가지였다.
무지하고 어설픈 우리들은 서로 엄마 아빠에 적응하느라 날이 바짝 섰다. 그러다 결국 내가 뻥 터져버렸다. 아이를 먹이고 트름을 시키고 있었다. 남편이 조리원 선생님처럼 어깨에 기대어 등을 쓸어주라 했던가? 근데 내가 가슴과 배를 받혀서 앉인 후 등을 도닥거렸던가? 상황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날 아이가 토 했다. 당황스러워 하는 내게 남편이 "거봐, 조리원 선생님 처럼 하라니까"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꼭지가 핑글 돌았다. 말이 말을 보태며 점점 커졌다.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나도 아이를 토하게 하려고 하는 거 아니지 않냐. 지금 아이가 토한게 내 탓이냐. 곁에 와서 같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왜 발을 빼고 거기서 니가 이래서 애가 그러지 그 따위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이가 토하고 다칠 때 마다 나한테 그렇게 다그치듯 욕할거냐. 나도 힘들고 당황스러운데 오빠 너까지 말을 보태면 나보고 어쩌라는거냐"
한 마디 말에 열 마디 백마디 설움과 분노가 따라온다. 두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목 놓아 울었다. 출산 후 일주일 동안 내게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호르몬은 불안정한 정서를 키웠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는 아이를 하루에 3번만 보기로 했다. 밤에 오는 수유 콜도 받지 않았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조리원복을 입고 근처 놀이터로 산책도 다녔다.
남편은 내게 말해줬다 "아이를 젖 먹이는 엄마의 모습은 아름다워"라고,
아이 젖을 먹이는 내 옆에서 아빠가 된 남편은 등을 토닥여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이 수유 사관학교에서 남편과 나는 한 편 먹기로 했다. 우리는 그 날부터 '신생아'사령관'을 모시는 의리로 뭉친 전우가 됐다.
산후우울증, 출산 전의 나를 보내는 애도 기간
점심에 밥을 먹으면서 통성명도 하고 남의 출산기도 듣기도 하고 분유회사, 학습지 회사, 사진관에서 해주는 무료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나는 아이와의 적응 이전에 출산 후 나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다.
곁에 같으 처지의 엄마들끼리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그 또한 듣는 것만으롣 위로가 된다.
어떤 영화에서 출산 한 딸이 내내 울기만 하자, 엄마가 말한다. "마음껏 울으렴. 출산은 예전의 나를 보내는 애도 과정과도 같아. 이제 엄마로서의 너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나의 아기 때 기억을 탈탈 털어도 나오는 건 없고, 멘땅의 헤딩하듯이 그렇게 해나간다. 도움의 손길이 상주하는 조리원을 느긋하게 즐기기 바란다.
조금 실수해도 괜찮다. 둘째 맘의 마음으로 아이를 믿고 하루를 편안하게 보내기를.
비워진 마음에 나를 조금씩 채워나가야 아이를 사랑할 힘이 생긴다. 이전에 내가 사라지고 엄마가 들어선게 아니다.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이 더해졌으니 더욱 나를 사랑할 일이다.
"참 잘했어요." 위대한 엄마가 된 나에게 더없는 찬사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