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주 감귤

by 이상훈


한 때는 대학나무라고 불렸던 감귤나무.
제주 감귤 밭에서 감귤을 수확하며 드는 생각이 언제부터 제주에 감귤나무가 있었을까? 였다.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귤 선물은 참 대단했다. 그때는 『미깡』이라고 불렀는데 일본말이면서 제주지역 사투리 같다.
당시에 감귤 맛을 본다는 것은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들에게 감귤을 세어서 하사했던 것과 같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감귤 선물을 보자 하면 대략 하단 지름이 20센티미터 상단 지름이 25센티 정도 높이 25센티미터 정도 과일바구니에 담아 팔았다. 과일바구니는 비용 절약을 위해서 인지 요즘 같이 촘촘하게 만들지 않고 생선구이용 석쇠같이 철사를 마름모꼴로 꼬아 만들듯 엉성하게 엮어 만들었다. 지금과 같은 과잉포장 시대에서 보면 훨씬 단출하고 실용적이라고 할 만했다. 바구니의 소재는 철사에 붉은색이나 주황색 비닐을 감아 만들었는데 나중에 포장을 뜯어 재활용하기도 했다.

감귤 값은 70년대만 하더라도 킬로그램당 3천 원이 넘었기에 감귤나무 10그루 정도만 있으면 아이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하여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감귤은 다 익으면 신맛보다 단맛이 훨씬 강하고 수분도 많아 겨울철 수분 보충과 감기 예방에 아주 좋았다.
내가 살던 고향의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의 상점에서는 과일바구니에 담긴 귤과 다양한 과자가 담긴 종합 선물세트가 인기였다. 값도 저렴하고 그럴싸한 포장이 한몫을 했다. 감귤을 자주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 관계로 집에 손님이 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때도 있었다. 간혹 외지에서 아버지 손님이라도 오게 되면 10원짜리 동전이나 귤 혹은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구경하고 맛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도 잊지 않았다. 물론 이웃집 아이도 뒤질세라 친척의 직업까지도 소개하는 등 자랑이 늘어졌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 지금과 같은 온주밀감(우리가 접하는 감귤은 온주밀감이며,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등은 감귤은 만감류 즉 기타 밀감류이다.)이 소개된 것은 가톨릭 신부였던 에밀 타케(프랑스, 한국명 엄택기) 신부에 의해서다. 물론 그전에도 감귤이 있었는데 온주밀감은 우리나라 감귤을 일본인들이 가져가 일본에 의해 개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들어온 시기는 대략 1910년대이다. 당시 한국의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에밀 타케 신부가 일본에 있는 있던 식물학자이자 신부였던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 자생지를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답례로 일본에서 온주밀감 14그루를 받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제주에 감귤이 재배된 기록은 삼한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역사서인 『肥後國史』에 삼한에서 귤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고 『古事記』에도 서기 60년경 ‘다지마 모리’란 자가 제주의 감귤을 가지고 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들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주도에서 재배된 것으로 짐작된다.『일본서기』에도 지금의 제주도인 상세국(桑世國)으로부터 귤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문무왕 때인 476년 탐라에서 지역 특산물로 헌상했다”라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1052년 탐라에서 세공으로 바쳐오던 감귤의 양을 1백 포로 늘린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고 있으며, 조선시대 기록에도 1392년 상공(常貢)으로 받아오던 감귤을 별공(別貢)으로 한다는 기록이『태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예전 기록에 나와 있는 귤의 종류를 보면 15가지나 되었다. 세조 원년(1455) 제주도 안무사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귤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었다.

“금귤과 유감(乳柑)과 동정귤(洞庭橘)이 상품이고, 감자(柑子)와 청귤(靑橘)이다음이며, 유자와 산귤(山橘)이 그다음이다”라고 했으며, 이외에도 당귤(唐橘), 왜 귤(倭橘), 황감(黃柑)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제주도의 감귤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감귤이 귀한 대접을 받았기에 조정의 진상품 목록으로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기에 제주목에 일하는 관리들이 이만저만 신경을 쓴 게 아닌 듯하다. 이를 테면 여름철에 관리들이 감귤나무가 있는 집을 방문하여 익지도 않은 감귤을 세어놓고 수확기에 반드시 수량을 맞추도록 하는 일까지 벌어져 제주민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가뜩이나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한 마당에 숫자를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관리들의 가렴주구 되어 버렸다. 감귤나무를 고의로 고사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고 조선말에 감귤재배면적의 감소로 이어졌을 듯하다. 감귤이 어느 정도 귀했느냐 하면 중종 19년(1524)에는 임금이 『雪中黃柑』이라는 시제를 신하들에게 지어 바치게 하고 황감을 한 쟁반씩 하사하기도 했으며, 명종 2년(1547)에는 홍문관 교리 이원록이 사직서를 내고 어머니 병 수발을 위하여 떠나려 하자, 임금이 밀감 40개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하에게 하사한 물량 치고는 매우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명종 19년(1564)부터는 제주도에서 귤을 진상하면 매년 성균관의 명륜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나눠준 뒤, 유생들을 시험하는 황감제(黃柑製)를 시행했다고 한다. 황감이 감귤 중 으뜸이었는지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