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March Avery)
비가 온다.
나는 비를 좋아하는 편이다. 비가 오면 둥둥 떠다니던 복잡한 마음과 시끄러운 머릿속의 먼지들이 같이 차분히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짧은 리서치에 의하면, 비가 오는 날엔 호르몬의 영향, 즉 햇빛에 의해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평소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우울감이 느껴지거나 졸음이 오는 등의 영향이 있다고도 하고, 저기압 상태가 되면서 관절이 약한 분들은 여기저기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는 거라고도 한다. 그러나 반면에 빗소리는 주파수의 영역이 넓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가 나는 백색소음이라 마음을 안정시키며 집중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단다.
밝은 낮에 돌아다니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고, 심지어 여름에는 햇볕 알레르기까지 생기는 나의 경우에는 아마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평소에도 좀 적은 편이라 우울감이 만성적으로 있는 것 같으니, 소리에 좀 더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건가 보다 생각한다. 그렇건 아니건, 나에게는 비 오는 날의 흙냄새와 빗소리는 오늘은 좀 쉬어도 괜찮아. 괜찮아. 토닥.토닥.토닥… 하듯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그림이나 작품들, 글들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들이 있고, 생각을 유도하는 것들이 있다. 해가 너무 쨍쨍할 땐 비가 필요하고, 비가 너무 많이 내릴 땐 햇빛이 필요하듯 이성이 우세해질 땐 감성적인 그림이나 글들을, 감성이 우세해질 땐 이성적인 그림이나 글들을 때에 따라 잘 알아채고 요리조리 잘 탐험해 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늘 바란다.
생각들에 좀 바싹바싹 말라가며 지쳐가는 느낌이 들 때쯤, 비 오는 날을 닮은 듯한 회색조의 톤 다운된 차분한 컬러와 싱그러운 초록잎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 질감의 컬러들, 옹기종기 모여있는 화분들. 늘 거기에 있었지만 배경처럼 지나치던 풍경들이다. 화분들이 서로 뭐라 뭐라 말하며 저들끼리 꺄르륵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한 선들이 부드럽다. 미국의 할머니 화가 March Avery(1932)의 그림이다.
간결한 선, 면의 처리와 차분한 색조의 부드러운 컬러매칭,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그 분위기가 짐작이 된다. 이날은 햇살이 좋은 날이었을 것도 같다. 어스름해지던 늦은 오후쯤일지도 모르겠고, 오늘은 비가 오니 비가 오던 어느 늦은 아침쯤이라고 상상해본들 무슨 상관이랴. 비 오는 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어둑어둑해지며 아늑해진 거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이는 옆에서 한참 놀자고 냥냥거리며 잔소리를 하더니 어느새 저 구석으로 가 잠이 소로록 들고, 나는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 어느새 부러워지는 마음이 되어 잠시 꿈꾸듯 바라본다.
아늑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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