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꿈을 이어서 꾼다 아니 때때로 꿈을 꾸면 전에 꾸었던 장소나 인물이 반복되어서 이어진다.
짜임새 있는 줄거리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꿈을 꾸면서도 여기 또 이 장소와 느낌이 데자뷔를 보는듯하였다.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의 것들을 나는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높은 돌산을 오르며 중간중간 있는 집들을 지나며 위태롭게 마을을 도시를 내려다본다.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일 것을 알면서 꿈에서는 산 능선을 휘휘 돌며 내려다본다.
예전 살던 집과 마을을 만나기도 한다.
집들은 복잡하게 서로 엉켜있고 추억 속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혼재하여 등장한다. 집을 수리를 하거나 동네에서 사람들이 복작거린다.
깨어 나서 어떤 예지몽일지 찾아보다가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 이내 포기해 버린다.
길몽일 수도 흉몽일 수도 그 어디도 아닌 개꿈일지도 모른 꿈이야기들은 이내 거짓말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도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서 살아가며 또 다른 기시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이 깨어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의식 속에서 꿈을 꾸며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혼재되어서 느끼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번 반복되는 어떠한 상황과 시간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바짝 긴장을 한다. 그 당시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려고 한다. 매번 같은 반복을 하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발전하고 성장한다고 믿고 그 믿음으로 살고 있지만 점점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상황극의 배우는 바뀌지만 역할은 동일한 그런 느낌이 들곤 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 과연 발전하고 생물처럼 자라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인류의 지성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같지가 않다. 더군다나 물질적인 풍요를 발전의 근거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감정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린 시절 비쌌던 음식이나 과일 등 먹거리, 옷들, 집과 차는 아무리 경제가 발전되고 풍요로워져도 지금도 비싸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능과 물질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가 소유하는 비교하는 상징으로서의 물질들은 어느 시대이건 배우만 바뀌었지만 그 역할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부모세대보다는 더 배우고 똑똑하고 건강하다고 믿지만 결국 부모세대만큼의 부를 이루거나 더 지혜롭고 행복했는지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어진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이 주는 안도감과 따듯함보다 사람이어서 결국은 그렇지 하는 실망과 절망을 느끼는 때가 많아진다.
인생의 성공이나 자유 또는 행복이란 전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소유욕이나 욕망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라면 끝없이 생겨나는 욕망에서 벗어나 물질과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더 실현가능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생덱지베리의 말대로 완벽함이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뺄 것이 없는 상태라 완성된다는 명제를 생각해 본다.
한때 불었던 히피즘과 미니멀리즘의 사유가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단지 서로를 우리는 믿지 못하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진 인간이기에 그런 삶이 쉽지는 않고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의 오묘함과 마음의 기묘함을 생각하면서 어지러운 줄타기를 하듯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니 어질어질하다.
우리는 끝내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무명일지라도 그저 각자가 꿈꾸는 그 무엇을 따라 걸어가는 것뿐이다.